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10편
요제프 괴벨스의 선동 전술
평범한 가정 출신이던 괴벨스
나약한 감성 파고드는 언어로
선거서 나치당 부상에 큰 기여
유대인 희생양 삼아 선동 나서
적대적 언어가 들끓고 있는
총선 정국 흔드는 선동전략

# 정치적 선동은 쉽다. 그게 거짓이라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면 몇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반박에 설득력이 있어도 선동을 부추긴 쪽은 불리하지 않다. 반박과 재반박이 거듭할수록 ‘거짓 이미지’만 남기 때문이다.

# 이런 선동은 나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주로 썼던 전략이다. 그런데 적대적 사고와 언어가 판치는 대한민국 총선 정국에서 여야 정치권이 ‘괴벨스의 선동 전략’을 꺼내 들고 있다.

괴벨스는 대중을 무지한 존재로 봤고 분노와 증오를 이용해 인종주의를 부추겼다.[사진=연합뉴스]
괴벨스는 대중을 무지한 존재로 봤고 분노와 증오를 이용해 인종주의를 부추겼다.[사진=연합뉴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독일 라인란트 출신의 한 청년은 애국심에 불타 군대에 자원했지만 참전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골수염을 앓아 다리가 굽고 왜소한 체격을 가져 현역 부적합 판정을 받은 탓이었다.

그는 비전투요원으로 복무했다.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자 그는 조국의 몰락을 보고 깊이 절망했다. 청년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몰두해 어학과 역사 과목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20대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문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전쟁에서 전사한 친구의 생애와 자신의 관념을 뒤섞어 반자전적인 소설 「미하엘(1925년)」을 출간했다. 일기 형식의 소설 「미하엘」은 어느 왜소한 청년이 좌절감에서 벗어나 ‘위대한 지도자’에게 헌신하는 과정을 감상적인 문체로 기록한 작품이었다. 육신이 온전하지 않았던 그는 언어의 힘을 신봉했다. 청년은 말과 글로 대중을 설득해 조국의 미래를 밝힐 지도자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 청년이 바로 나치의 선전장관이자 히틀러의 ‘입’이었던 요제프 괴벨스(1897~1945년)다. 괴벨스는 대학을 졸업한 후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1925년, 어느 지도자를 만났다. 그가 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거라고 믿은 그 지도자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미술학교 진학에 실패한 후 실업자로 지내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부사관으로 참전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그다지 뛰어난 언술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괴벨스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집권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나약함과 감성을 파고드는 괴벨스의 언어는 패전 이후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의 심성을 자극했다. 괴벨스의 선전으로 1928년 5월에 3%에 불과했던 나치당의 지지율은 1930년 9월 18%로 급등했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히틀러는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1932년 제국의회가 해산된 직후 실시한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의 득표율로 제1당에 올랐다. 마침내 1933년 1월,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그해 3월 독일 국민을 계몽하고 선전할 ‘제국선전부’를 설립하고 그 자리에 괴벨스를 임명했다.

괴벨스의 선전술 원칙은 명료했다. 그는 대중을 신뢰하지 않았다. “선전은 쉽게 학습될 수 있어야 하고, 간단한 용어나 슬로건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다” “대중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는다”는 소신을 지녔던 괴벨스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간명한 언어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단순하게 가공한 다음 반복했다. 괴벨스는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다수의 무지한 대중을 설득하는 자가 선거에서 이기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괴벨스는 비판 의식을 지닌 지식인들을 고립시키고 대중들에게 증오심을 주입하는 교활한 방식을 애용했다.

당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독일 비평가 발터 베냐민(1892~1940년)은 영화, 확성기, 라디오, 활자인쇄술 등 ‘복제기술’이 정치 참여와 예술 향유의 장벽을 낮춰 계급의 격차를 허물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복제기술’을 누구보다 유용하게 활용한 것은 괴벨스가 이끄는 나치당의 선전부였다.

괴벨스는 연설, 신문, 포스터, 유니폼, 음반, 라디오, 영화, 악단, 합창, 대규모 퍼레이드와 군중집회를 다각적으로 활용해 군중을 자극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가혹한 배상금과 군비軍備가 제한되는 굴욕을 겪은 독일 국민은 괴벨스의 선전에 열광했다.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십분 활용했다. 감성에 물든 대중의 증오는 쉽게 증폭한다. 독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괴벨스는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증오가 증폭할수록 대중이 영웅을 갈망한다는 사실도 괴벨스는 정확하게 간파했다. 좌절을 겪은 자들은 아래로부터의 결정보다 위로부터의 지배를 더 편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나치 선전부는 오로지 총통만이 유대인으로부터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영웅이라고 떠들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열광하는 대중을 보며 이렇게 적었다. “대중은 지배자를 기다릴 뿐 자유를 줘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것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내뱉은 대사와도 흡사하다. 

괴벨스의 선전에 세뇌된 독일인들은 불과 몇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그가 선동에서 이용한 인종주의는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 전쟁 중에도 괴벨스의 선전은 독일인의 사기를 고양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로 공포감이 고조되자 괴벨스는 라디오에서 ‘총력전 연설’을 시행했다.

이 연설에서 괴벨스는 소련과 맞서는 독일이 유럽의 자유를 수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선전했다. 이 연설 이후 독일군의 사기는 다시 높아졌고, 전쟁은 더욱 격렬하게 이어졌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 괴벨스는 가족과 함께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여야 정치권이 ‘선동정치’에 시동을 걸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여야 정치권이 ‘선동정치’에 시동을 걸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괴벨스의 탁월한 선전술은 종전 이후 많은 연구를 낳았다. 히틀러를 대변한 ‘악마의 혀’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괴벨스는 처음부터 악마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지적이고 가정적인 인물이었다. 위법으로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괴벨스의 선전술은 오늘날의 정부와 언론도 자주 활용한다. “선동은 문장 하나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해명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대중들은 해명보다 선동 내용을 더 잘 기억한다.” 

너무도 유명한 이 말은 오늘날 언론의 치부와도 연루된다. 언론이 흑색선전과 폭로로 불리한 이슈를 바꾸며 특정한 내용을 반복 선전하면 대중들은 쉽게 그 논조를 답습한다. 언론은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입하면서 증오할 대상을 은근히 지정하기도 한다. 

괴벨스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대중들은 누구라도 선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 SNS에 올린 글이 사회적 파장을 낳을 때 정보를 생성한 주체는 강렬한 효능감을 느낀다. 대다수 사람들은 SNS와 블로그, 카톡에 실제보다 나은 이미지를 올리고 타인의 찬사를 받으며 만족감을 얻는다. 정치인들 역시 복잡한 설득보다는 간단명료한 메시지로 입장과 정책을 홍보한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는 SNS에 올린 몇 글자로 청년 여론을 자극하는 일도 벌어졌다.   

괴벨스의 말처럼 그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자면 몇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반박과 재반박이 거듭할수록 상세한 내용보다는 간단한 단어와 이미지만 남는다. 괴벨스를 연구한 독일 저널리스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1952년~)는 저서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2006년)」에서 오늘날 정치와 언론, 마케팅에서 활용하는 ‘효율적인 홍보’의 대부분이 괴벨스의 선전술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괴벨스의 언어는 대상과 강도를 달리한 채 지금도 반복한다. 냉전적 사고와 적대적 언어가 들끓는 지금 여기에서 괴벨스의 선동술은 더욱 유효하게 작동하기 쉽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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