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7편 권력에 대항하는 웃음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애국주의에 심취한 히틀러
권력 잡자마자 미디어 통제
저항하는 유머에 눈 뜬 채플린
나치, 채플린 인기 극도로 경계
풍자가 두려운 억압적 권력자들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웃음이다. 권력자들은 웃음거리로 전락할 바에는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길 바란다.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 ‘광기’에 휩싸인 그에게 스크린 안에서 독재자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찰리 채플린은 ‘공포’였다. 속 시원한 ‘풍자’마저 어려워진 우리나라에서 권력자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찰리 채플린은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 웃음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사진=뉴시스]
찰리 채플린은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 웃음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사진=뉴시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과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에 태어났고 히틀러는 나흘 후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비슷한 콧수염을 길렀고 예술가를 꿈꿨다. 또한 두 사람은 모두 쇼펜하우어의 애독자였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공통점은 미디어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일본의 채플린 연구가이자 영화 프로듀서인 오노 히로유키의 저서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사계절ㆍ2017년)」은 두 사람의 엇갈린 삶을 탐구한 명저다.

채플린의 부모는 가난한 뮤직홀 배우였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가 3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홀로 채플린을 키우면서 정신질환에 걸렸다. 채플린은 이복형과 함께 비좁은 다락방과 구빈원救貧院을 전전했다. 

히틀러는 세관원인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히틀러는 훗날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했다고 적었지만, 그것은 과장된 진술이었다. 

극빈한 성장기를 보낸 채플린은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을 전하는 희극배우가 됐다. 채플린의 어머니는 때때로 무대의상을 입고 춤을 추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어린 아들을 웃게 했다. 채플린은 훗날 자서전에서 날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춤추던 어머니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서 어머니는 이 세상의 가장 찬란한 빛을 내게 비춰줬다. 그것은 문학과 연극의 소재로 가장 많이 쓰이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인간애에 관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18살에 응시한 빈 조형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2년 연속 낙방했다. 이 시기의 열패감은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은둔한 채 외톨이로 지내던 히틀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주의와 영웅주의에 심취해 자원입대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히틀러는 인종주의를 신봉하고 유대인을 혐오하게 됐다. 

반대로 1914년 소속 극단 ‘카노’의 미국 순회공연 도중 스크린에 데뷔한 채플린은 세상에 저항하는 유머에 눈을 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은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동했다. 구시대 미디어인 연극은 새로운 미디어인 영화로 빠르게 대체됐다. 채플린의 재능과 유머는 이 시기에 빛을 봤다. 채플린은 미국에서 특유의 콧수염과 ‘방랑자’ 캐릭터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나치는 웃음을 경계했고 특히 찰리 채플린의 예술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사진=연합뉴스]
나치는 웃음을 경계했고 특히 찰리 채플린의 예술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사진=연합뉴스]

그의 연기는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받는 서민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줬다. 예술가의 꿈이 좌절된 후 히틀러는 나치에 입당했다. 나치는 선전 수단으로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전국의 영화관에서 선전 영화를 상영하고 연설을 녹음한 레코드를 배포했다. 

1931년 채플린이 베를린을 방문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나치는 채플린을 극도로 경계했다. 나치는 미디어가 웃음을 전파하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앙리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웃음은 집단적으로 공범의식을 교환하는 고차원적인 행위다. 실제로 다음 해 선거 때 히틀러에 반대하는 사람들 일부가 투표용지에 ‘채플린’을 적어내는 일이 발생했다. 이것은 적발하기 어려운 사보타주(sabotageㆍ광의의 태업)였다.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미디어를 강력히 통제했다. 나치는 채플린이 유대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나치 선전부는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의 상영을 방해하고 채플린이 나오는 우편엽서의 판매도 금지했다. 히틀러는 특히 채플린의 ‘콧수염’을 싫어했다. 콧수염은 독일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빌헬름 2세,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등 독일 지도자들은 수염을 길러 지도자의 위엄을 과시했다. 채플린의 사진은 콧수염이 없는 것만 허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이 서유럽을 유린할 때 미국에서는 채플린 주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1940년)’가 개봉했다. 영화에는 힝켈이라는 독재자를 닮은 유대인 이발사가 등장한다. 두 사람의 외모는 측근들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흡사했다. 두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 돌격대가 힝켈을 체포하자 이발사가 힝켈의 자리에 오른다. 권력자가 된 이발사는 이웃 나라 오스테를리히를 정복하는 기념식에서 ‘반독재, 민주주의, 세계평화’를 외치는 연설을 한다. 

히틀러가 연설할 때마다 이 영화는 화제에 올랐다. 채플린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히틀러는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견디다 못한 히틀러는 카메라 앞에서 연설하기를 기피하고 라디오 연설에 치중했다. 

예나 지금이나 억압적인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풍자와 웃음이다. 그들은 질문과 토론을 기피하면서 풍자와 웃음의 재료를 줄이려고 발버둥친다. 웃음이 견고한 권위를 쉽게 무너뜨리는 수단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채플린이 영화에서 외쳤던 평화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냉전으로 세계는 양분했고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채플린은 소련에 우호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감시를 받았다. 매카시즘의 광풍을 피해 채플린은 유럽으로 돌아왔다. 이후 채플린은 세계평화와 영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72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다.

히틀러가 미술학교에 입학했더라면, 혹은 채플린에게 활기찬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경험과 환경에 따라 선과 악은 다르게 발현된다.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타인의 거울이다. 

채플린의 삶은 긍정과 사랑의 놀라운 힘을 입증한다. 반면 히틀러의 삶은 열등감과 혐오에서 비롯된 폭력이 한 개인과 세계를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어쨌거나 히틀러와 채플린은 영화라는 미디어에서 충돌했고, 이 대결은 채플린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는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게 ‘웃음’이란 명제를 입증해주는 사례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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