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❺

‘운명론(fatalism)’과 ‘결정론(determinism)’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2가지 방식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철저하게 인과관계로 이뤄져 있다.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결정된다. 반면 ‘운명론’은 모든 것은 나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운명론’과 ‘결정론’ 중 어느 것을 믿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진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운명론’과 ‘결정론’ 중 어느 것을 믿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진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희대의 살인마 안톤. 그는 보안관을 목졸라 죽이고 파출소 화장실에서 손까지 씻은 뒤 파출소 순찰차를 타고 유유히 떠난다. 안톤은 인적 드문 도로에서 지나가던 차를 세운다. 영문도 모르고 차를 세운 운전자는 당연히 살해당한다. 안톤은 순찰차를 민간차량으로 바꿔 타고 사라진다. 희대의 살인마의 인상적인 등장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렇게 등장한 안톤은 훔친 차를 타고 한적한 시골 주유소 겸 잡화점에 나타난다. 앞서 저지른 2건의 사건은 그의 거침없고 단호하고 군더더기 없는 살인 행각을 보여준다면, 잡화점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그의 ‘세계관’과 ‘살인의 철학’을 보여주는 무척 인상적인 시퀀스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철학이 있다. 살인마라고 세계관과 철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뚜렷한지도 모르겠다.

살생부를 쥔 안톤은 운명의 신이나 다름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살생부를 쥔 안톤은 운명의 신이나 다름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잡화점 주인은 계산대에서 안톤에게 ‘댈러스도 가뭄이 심하냐’는 무심한 한마디를 건넸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린다. 그렇잖아도 기분 나쁘게 생긴 안톤은 기분 나쁜 억양과 기분 나쁜 저음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안톤은 25센트 동전 하나를 꺼내들고 가게 주인에게 황당한 ‘동전 던지기’를 통고한다. 옹색한 가게 주인 앞에 버티고 선 검은 복장의 안톤은 우리네 ‘전설의 고향’에 단골 등장하는 저승사자를 닮았다.

안톤은 자신의 세계관을 동전으로 설파한다. 던져질 동전은 1958년 발행돼 1980년(영화의 배경)까지 22년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고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결국 보이는 건 앞면 아니면 뒷면일 뿐이다. 그 외의 가능성은 없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도 뒷면도 아닌 똑바로 서거나 비스듬히 누울 가능성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떠돌며 수많은 사람들과 여러 일들을 겪지만 결국 매번 마주하는 문제는 ‘삶’ 아니면 ‘죽음’일 뿐이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자신이다. “이제 동전을 던져서 너의 생사를 네가 결정하라”는 제안 아닌 일방적인 통고다. 가게 주인은 자신이 왜 생사를 건 동전 던지기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동전을 던질 수밖에 없다. 동전 던지기를 거부하면 당연히 죽을 것이고, 동전 던지기를 받아들이면 그나마 살아날 가망이 있어 보인다. 인적 드문 텍사스 황량한 벌판의 잡화점에서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에는 2가지가 있다. ‘운명론’과 ‘결정론’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철저하게 인과관계로 이뤄져 있다. 모든 것이 원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고,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좋든 나쁘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

‘운명론’은 “모든 것은 나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원인 없는 결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게 주인은 ‘결정론자’다. 자신이 왜 모든 것을 걸고 동전을 던져야 하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의한다. 반면 안톤은 ‘운명론자’다. “네가 죽을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운명인지 아닌지 동전을 던져 알아보자”고 한다. ‘동전 던지기’도 가게 주인이 던지는 것이 아니다.

흙수저·금수저 논란처럼 지금 우리나라는 ‘운명론’이 기승을 부린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흙수저·금수저 논란처럼 지금 우리나라는 ‘운명론’이 기승을 부린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가게 주인은 단지 앞면과 뒷면 중에서 선택하고 동전은 안톤이 던진다. 안톤이야말로 가게 주인의 운명을 한손에 틀어쥔 운명의 신이다. 안톤이 던진 동전은 다행히 가게 주인이 선택한 앞면으로 떨어진다. 안톤은 운명의 명령에 따른다. 안톤은 집을 잘못 찾아온 저승사자처럼 살생부를 들고 나간다. 가게 주인은 목숨은 다행히 건졌지만 아마 한동안 가게문을 닫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듯하다.

우리는 대개 ‘결정론’을 믿거나 믿고 싶어한다. 노력을 하고 희생을 치르면 그만한 보답이 따르기를 기대하거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암담한 현실에 봉착하면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했느냐’며 한탄하거나 분노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불쑥불쑥 안톤이 나타나 내가 원치 않는 가혹한 선택을 강요한다. 나의 운명을 나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온전히 안톤처럼 무표정하고 무정한 누군가가 던지는 동전에 맡겨야 한다. 동전 던지기 게임에 합류하는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니고, 그 결과도 내 의지와는 무관하다.

늙은 가게 주인이 살던 시대는 어느 정도 ‘결정론’이 작동했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어느 정도 꿈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흙수저ㆍ금수저 논란처럼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운명론’이 기승을 부린다. 내가 아무리 죄 안 짓고 열심히 노력해도 나보다 어린 재벌 3세의 쌍욕을 듣고 물벼락을 맞아야 한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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