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➋ 푸르밀이 남긴 과제
을 중 을 대리점주의 눈물
오너리스크 피해 무방비

기업 한곳이 문을 닫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위협받는다. 지난 10월 사업종료를 선언했다가 철회한 중견기업 ‘푸르밀 사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예다. 푸르밀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은 1000여명에 달하는데, 이중 일부만이 생계를 보장받았다. 문제는 경기 침체, 금리 인상 등으로 경영난에 처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제2, 제3의 푸르밀 사태가 터질 우려가 높다는 점이다. 

푸르밀이 사업 재개를 선언했지만 이미 수많은 대리점이 피해를 입었다.[사진=연합뉴스]
푸르밀이 사업 재개를 선언했지만 이미 수많은 대리점이 피해를 입었다.[사진=연합뉴스]

‘푸르밀 사태’가 일단락난 지 어느덧 한달째에 접어들고 있다. 갑작스러운 사측의 ‘사업종료’ 선언에 집단 실직 위기에 처했던 푸르밀 노동자와 대리점주는 일단 한시름 놨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푸르밀이 사업 재개 조건으로 인력의 30% 구조조정을 선언한 탓에 110여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났다. 전체 대리점의 절반가량은 일감을 잃었다.

사업 정상화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푸르밀이 사업종료 선언과 철회를 반복하면서 협력사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푸르밀이 사업 재개를 하려고 해도 납품업체, 유통업체 등의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제2, 제3의’ 푸르밀 사태가 터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 둔화, 금리 인상, 원자재 가격 상승, 환율 급등 등이 맞물리면서 경영난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부쩍 늘어났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좀비기업’이라 불리는 한계기업은 2823곳(2021년 기준)에 달하는데, 이들 기업의 어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커질 게 분명하다.

기준금리 인상이 시중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한계기업 원리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2023년 12월까지 기업들의 대출이자 부담액이 16조2000억원(올해 9월 대비)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같은 기간 한계기업의 이자 부담액은 94% 급증할 전망이다.[※참고: 한계기업이란 영업 활동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재무적 어려움을 겪는,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이자비용)이 1 미만인 기업을 의미한다.] 

김대종 세종대(경영학) 교수는 “상장사 중에도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속출할 만큼 경영 환경이 악화하고 있다”면서 “지속적인 금리 인상으로 금융 한계에 처하는 기업들이 2024년까지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푸르밀 사태에서 봤듯 기업 하나가 쓰러지면 거기에 달린 노동자, 대리점, 협력사까지 수천~수만명이 영향을 받는다. 지금이야말로 푸르밀 사태가 남긴 과제를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 무엇을 개선해야 할까. 가장 시급한 건 ‘을 중의 을’인 대리점 문제다. 언급했듯 푸르밀이 사업 정상화를 선언했지만 이미 숱한 대리점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500여개 대리점 중 절반가량에 달하는 위탁대리점이 일감을 잃었다. 푸르밀이 사업을 축소하면서 대형마트·편의점 등에 제품을 납품하는 위탁대리점과의 계약을 끊었기 때문이다. 위탁대리점으로선 갑작스러운 계약 종료를 당했지만 이렇다 할 보상 대책은 없었다. 이는 푸르밀 대리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일방적으로 계약관계를 정리해도 대리점으로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무엇보다 대리점 계약기간이 1~2년 단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다. 푸르밀 위탁대리점 역시 대부분 1년 단위 계약을 맺고 있었다.

푸르밀 대리점주 A씨는 이렇게 토로했다. “매년 12월 본사와 위탁계약이 자동 갱신돼 왔다. 당초 푸르밀이 11월 사업종료를 발표하면서 11월을 끝으로 갑자기 계약이 종료됐다. 남은 한달치의 손해를 보상받으려면 결국 소송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나.” 

문제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9년 ‘표준대리점계약서’를 개정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당시 공정위는 식음료·의류업종 표준대리점계약서에 최소 4년의 계약기간을 보장하고, 대리점의 계약갱신청구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대리점의 영업권을 보장해준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표준대리점계약서 자체가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이라는 한계가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식음료·의류업종뿐만 아니라) 18개 업종에 표준대리점계약서를 도입해 업종별로 최대 5년까지 계약기간을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대리점이 투자한 비용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호장치다. 다만 표준대리점계약서 자체가 권고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다.” 

대리점이 겪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오너리스크’와 같은 경영상 이유로 피해를 입어도 보상을 요구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양유업이다. 2013년 ‘밀어내기’ 사태로 불매운동의 직격탄을 맞은 남양유업은 지난해 5월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자사 제품인 ‘불가리스’가 코로나19 예방효과가 있다는 허위광고를 했다가 식약처로부터 철퇴(식품표시광고법 위반)를 맞은 탓이었다. 

소비자 사이에선 또다시 불매운동이 불붙었고, 이 불씨는 대리점 피해로 직결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리점은 손실 보상을 요구할 수 없었다. 2016년 본사의 갑질을 막을 ‘남양유업 방지법(대리점거래의공정화에관한법률)’이 시행되긴 했지만, 이 법엔 오너리스크로 인한 대리점의 손실 보상 조항이 없었다. 이 문제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현장의 상황을 1문1답으로 쉽게 풀어봤다.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경영진의 잘못으로 피해를 보는 대리점주에게 어떻게 보상할 건가.”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회사를 매각해 보상하겠다.”


홍원식 회장은 불가리스 사태 직후인 지난해 5월 사모펀드 ‘한앤컴퍼니’에 오너 일가 지분 전체(53.08%)를 매각하는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4개월 만인 9월 돌연 철회하면서 한앤컴퍼니와 소송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때문에 불매운동으로 인한 대리점의 피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푸르밀 대리점주 A씨는 “경영진의 잘못으로 인한 피해는 모두 대리점의 몫이다”면서 “십수년간 함께한 대리점인데, 법적 보상 의무가 없더라도 도의적 책임은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우리는 과연 제2, 제3의 푸르밀 사태를 제대로 대비할 수 있을까.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