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視리즈] 시중은행 도덕적 해이➌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전문가집단과 모럴해저드
​​​​​​​금융·법조·의료·언론계에서 
도덕적 해이 난무하는 이유
우월적 지위 독으로 작용해 
오만, 합리화, 폐쇄주의 한몫 
은행 윤리강령 위반사례로 본
전문가집단의 도덕적 해이 

# 시장에서 ‘도덕적 해이’는 대리인(Agent·전문가)이 주인(Principal·소비자)보다 우월적 지위에 서있을 때 발생한다. 예컨대, 의학 지식을 독점한 의사(대리인)가 더 많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환자(주인) 몰래 과잉진료를 하는 식이다. 이는 도덕적 해이가 법조계(검찰)·금융계·의료계·언론계 등 전문가집단에서 더 많이 표출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 이런 측면에서 ‘도덕적 해이’ 현상이 불거질 때 ‘내부통제시스템’의 부실함을 거론하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문가집단의 우월적 구조와 폐쇄적 문화를 뿌리뽑지 못한다면, ‘내부통제시스템’은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거나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 

# 최근 5대 시중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엿볼 수 있는 보고서가 공개됐다. 결과는 뼈아프다. 지난 5년간 5대 시중은행 임직원이 사내윤리강령을 위반해 징계(배임·횡령·금품수수 등)를 받은 건수는 283건(중복 제외)에 달했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윤리강령을 위반한 사례가 발생한 셈이다.

# 5대 시중은행이 글로벌 수준의 ‘내부통제시스템’을 갖췄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찌 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 없다. 답을 찾기 위해선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우린 지금 무엇을 점검해야 할까. 더스쿠프의 ‘視리즈’ 시중은행 도덕적 해이 마지막 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이다. 

시중은행의 내부통제시스템은 선진화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사내윤리강령 위반사례가 끊이지 않는 건 시스템과 무관한 요인이 있다는 거다. [사진=뉴시스] 
시중은행의 내부통제시스템은 선진화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사내윤리강령 위반사례가 끊이지 않는 건 시스템과 무관한 요인이 있다는 거다. [사진=뉴시스] 

# 파국 부른 선물딜러 

2008년 1월. 유럽을 대표하는 은행 중 한곳인 소시에테제네랄(이하 SG은행)이 혼돈의 늪에 빠졌다. 이 은행의 선물딜러인 제롬 케르비엘이 동료들에게 “49억 유로(약 7조원·현재 환율 기준)의 손실을 냈다”고 자백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이 일으킨 금융사고로선 역대 최대 피해 금액이었다. 

제롬은 간교하면서도 대담했다. SG은행 안에 비밀사업체를 세우고, 다른 거래인의 명의를 도용해 선물상품에 투자했다가 큰 돈을 날렸다. 자신이 초래한 손실을 은폐하기 위해 동료 ID를 활용해 거래기록을 위조하기도 했다.

제롬이 자백할 때까지 손실 내역을 까맣게 몰랐던 SG은행 측은 부랴부랴 사태 파악에 나섰지만, 파문은 이미 은행의 담장을 넘어선 뒤였다. [※참고: 최근 일부 종목의 주가 폭락으로 불거진 ‘SG 사태’의 SG증권이 프랑스 SG그룹의 계열사다.]
 
# 쏟아진 질문들

수많은 금융인이 아연실색했다. 미 투자은행 캔터피츠제럴드의 하워드 루트닉 CEO는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졌다. “한 사람이 모든 걸 설계할 순 있지만, 한 사람이 모든 자금을 조달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전 영국 금융감독청장 하워드 데이비스도 “SG은행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의문에 또다른 불씨를 지폈다. “한 사람이 은행의 통제 절차를 면밀히 알고 있었더라도, 이 정도 금액의 손실은 막아냈어야 하지 않나.” 

타당한 의문이었다. 1864년에 설립된 SG은행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금융회사다. 업력만큼 내부통제시스템도 탄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렇다면 일개 선물딜러 제롬은 어떻게 철저한 내부감시망을 무력화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중요하다. 시중은행의 내부통제시스템이 왜 그리 쉽게 무너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서다. 

# 법과 제도의 완비

SG와 제롬을 둘러싼 의문을 풀기 전에 관점을 국내 시중은행으로 돌려보자. 우리나라 은행의 내부통제시스템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일단 법적·제도적 체계는 완비했다. 2017년 금융사지배구조법 시행 후 금융사들은 의무적으로 내부통제기준을 마련했다. 이는 내부통제절차를 소홀하게 밟은 금융사의 수장에게 책임을 묻는 ‘법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국내 은행의 내부통제시스템은 제법 단단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다. 시중은행에서 줄줄이 터져 나오는 사건·사고를 훑어보면, ‘이들이 내부통제를 하고 있긴 한가’란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사례를 하나씩 살펴보자. 
 
# 끝없는 사건·사고 행렬 

2022년 우리은행에선 600억원대 횡령사건이 터졌다. 규모도 컸지만 횡령 과정은 더 심각했다. 우리은행 본점의 기업개선부 직원 A씨는 2012년 6월부터 2020년 6월까지 8차례에 걸쳐 은행돈 697억원을 빼돌렸다.

그 과정에서 직인·비밀번호를 도용하고 각종 문서를 수차례 위조했다. 우리은행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해당 직원의 횡령이 밝혀진 건 그가 돈을 모두 빼돌리고 2년 가까이 흐른 지난해 4월이었다. 

‘리딩뱅크’를 자부하는 KB국민은행도 다르지 않다. 2022년 12월 KB국민은행에선 120억원 규모의 배임 사건이 터졌다. 지방 지점 직원 B씨가 부동산 대출 서류를 조작해 120억4000만원을 부당하게 인출했다.

내부감시망이 범죄 행각을 놓칠 만큼 대출 기간이 짧았던 것도 아니다. 부당대출은 2021년 5월부터 2022년 12월 2일까지 1년 7개월이나 계속됐다. 그런데도 KB국민은행의 감시망은 내부 직원의 제보를 받은 후에야 작동했다. 
몇몇 은행 관계자는 “내부통제시스템으론 막을 수 없는 대형사고로 봐야 한다”며 예외를 운운하지만 그렇지 않다.

은행 내부감시망의 밑단에서 터지는 건 대형사고만이 아니다. 크고 작은 배임·횡령 사건은 그 수를 헤아리는 것조차 어렵다. 은행돈을 내돈처럼 쓰는 행위(사적금전대차)도 만연해 있다. 

최근 양정숙 의원(무소속)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자료 하나를 보자. 여기엔 2018~2022년 5대 시중은행 임직원이 사내윤리강령을 위반해 받은 징계 건수와 종류(사적금전대차, 배임·횡령, 폭행·폭언, 성희롱·성추행, 부당지시, 품위유지 위반, 금품수수, 무자원거래 금지 위반)가 담겨 있다. 

결과는 뼈아프다. 지난 5년간 시중은행의 징계 건수는 총 283건(중복 사건 징계 제외)에 이른다. KB국민은행 91건, 우리은행 63건, 하나은행 56건, NH농협은행 38건, 신한은행 35건 순이다. 

2019년 이후엔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60건이 넘는 사내윤리강령 위반 사건이 터졌다. 1년이 대략 52주라는 점을 감안하면, 5대 시중은행에선 일주일에 한번씩 사건·사고가 터진 셈이다. 

그럼 시중은행의 도덕적 해이가 이토록 극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막을 방법은 없는 걸까. 이쯤에서 도덕적 해이를 경제적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5대 시중은행의 사내윤리강령 위반사례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뉴시스] 
5대 시중은행의 사내윤리강령 위반사례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뉴시스] 

# 자기 합리화의 덫 

시장에서 ‘도덕적 해이’는 주인(Principal·소비자)이 대리인(Agent·전문가)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가령, 의사가 더 많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환자의 눈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과잉진료를 하는 식이다. 

이같은 현상은 통상 주인보다 대리인이 우월한 지위(정보든 권력이든 돈이든)에 서 있을 때 나타나는데, 이는 도덕적 해이가 의료계·법조계·금융계 등 전문가집단에서 더 많이 표출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금융사고가 터질 때마다 불거지는 ‘부실한 내부통제시스템’ ‘순환보직 결여’ 등의 문제는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는 부차적 원인에 불과하다. 근본 원인은 은행의 우월적 구조와 폐쇄적 문화에 있다.

▲‘우리가 법이나 규정을 어겨도 일반인은 모른다’는 오만, ▲‘조직 내 많은 이들이 하니까 나도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 ▲‘조직 문제가 표출되면 공멸하니 비호해야 한다’는 비밀주의와 제식구 감싸기가 문제란 거다. 

이들은 내부통제시스템을 제법 탄탄하게 구축한 은행 내부에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뿌리뽑고 싶다면 외부 감시망을 구축하고, 처벌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시중은행 안팎에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조직이 비호해줄 것이란 황당한 발상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막으려면 갈등을 빚더라도 외부 감시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엄격한 처벌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흥미롭게도 SG은행에서 찾을 수 있다. 이쯤에서 다시 SG로 시선을 돌려보자.   

전문가집단에서 도덕적 해이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전문가집단에서 도덕적 해이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SG은행의 처방전 

선물딜러 한명의 도덕적 해이를 막지 못한 다니엘 부통 SG은행 회장은 이사회에 사임의사를 전달했다. 이사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사태를 먼저 수습하라”는 의미였다. 

SG은행과 부통 회장은 칼집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문제를 일으킨 선물딜러 제롬을 고발하고, 뤽 프랑소와 세계 주식·파생상품 담당 공동대표, 쟝 피에르 르사쥬 자원 담당 대표를 해고했다. 채권·외환·상품 담당 공동 대표를 맡고 있던 마르크 브레이유 등은 다른 부서로 좌천시켰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은행 내부에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제롬의 행적을 꼼꼼하게 조사했다. 미래에 발생할 잠재적 위험요인까지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다음에야 부통 회장은 고객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편지’를 보냈다. “…우린 유사한 위험이 더 이상 재발하지 않도록 내부통제시스템을 개선하고 강화했습니다. 또한 자본을 충분히 늘려 이번 사건으로 발생한 손실을 상쇄할 겁니다….” 강도 높은 처벌 후 내부통제시스템을 손봤다는 얘기다.

[※참고: 부통 회장은 ‘불방망이’를 들어 위기를 타개하긴 했지만, 내로남불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쓴 채 퇴진했다. 그는 제롬 사태가 터진 이듬해 4월 자신 사임했는데, 로이터는 “부통 회장이 퇴직 후 매년 73만 유로의 연금을 받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게 결정타로 작용했다”고 전했다. 이 사례는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끊임없이 감시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시사해 준다.] 

# 못난 가시처럼
 

자! 이제 결론을 이야기보자. 우리나라에서 도덕적 해이란 말이 보편화한 건 1998년께다. 당시 이규성 재경부 장관이 취임사에서 “사회에 퍼져있는 도덕적 해이를 뿌리뽑겠다”고 말하면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말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벌써 25년이 흘렀지만 애석하게도 도덕적 해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나쁜 가시’처럼 박혀 있다. 언급했듯 그 배경엔 전문가 집단의 오만, 자기 합리화, 조직적 비호문화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에 도덕적 해이를 뿌리뽑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사진=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에 도덕적 해이를 뿌리뽑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사진=연합뉴스]

다시 양정숙 의원의 자료를 꺼내보자. 2018~2022년 5대 시중은행 임직원 중 ‘은행돈을 내돈처럼 마구 사용한’ 사적금전대차 사건은 62건에 달했다. 이중 형사고발된 사례는 10건(16.1%)밖에 없었다.

같은 기간 33건의 사적금전대차 사건이 발생한 KB국민은행은 고작 3건(9.1%)을 형사고발했다. 그마저도 2021년 이후론 제로다. 이쯤 되면 시중은행이 조직적 비호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들은 과연 도덕적 해이란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까. 국내 시중은행의 민낯이 이 모양이다.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강서구·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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