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개편안 우회로 선택
정부, 주 52시간제 유지하되
일부 업종 · 직종 완화 방안 내놔
제조업 · 생산직에 적용할 전망
韓, OECD 국가 중 5번째 오래 일해
장시간 근로, 노동자 건강권 위협
일한 만큼 못 쉬는 것도 문제…
민생과 직결된 노동 정책 신중해야

근로시간 변경 문제는 관련 당사자의 수용성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대다수 국민이 당사자여서 민생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도 복잡하기 때문이다.[사진=뉴시스]
근로시간 변경 문제는 관련 당사자의 수용성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대다수 국민이 당사자여서 민생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도 복잡하기 때문이다.[사진=뉴시스]

정부가 ‘주 69시간 노동’ 논란을 빚은 근로시간 개편 원안을 포기하고 우회로를 선택했다. 현행 주 52시간제의 틀은 유지하되 원하는 일부 업종과 직종에 한해서 연장근로 단위를 확대하는 방안이다. 대상 업종·직종, 주당 상한 근로시간은 실태조사와 사회적 대화를 통해 결정하자는 것이다. 

이로써 주간 단위로 관리하는 근로시간을 월이나 반기, 연간 관리로 확대하려던 정부 정책은 무산됐다. 정부가 늦게나마 잘못된 정책 방향을 인정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는 개편안을 만들기로 한 것은 다행이다. 6월부터 사회적 대화를 거부해온 한국노총이 노사정 대화 참여를 선언한 것도 긍정적이다. 

정부가 지난 3월 내놓은 근로제도 개편은 주 52시간제(기본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에서는 일부 업종에서 일감을 기한 내 마무리할 수 없는 애로를 해소하자는 뜻에서 추진됐다. 1주 40시간 범위 내에서 특정 주 52시간, 특정 일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는 것을 월·분기·반기·연 등으로 유연화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주 최대 근로시간이 69시간까지 늘어날 수 있다며 반발이 거셌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물론 MZ노조도 반대했다. 다수 여론조사에서 ‘불규칙한 장시간 노동으로 삶의 질이 저하된다’는 반대 의견이 ‘바쁠 때 몰아서 일하고 길게 쉴 수 있다’는 찬성을 압도했다. 정부는 결국 원안을 백지화하고 재검토에 들어갔다.

노동부가 6~8월 60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주52시간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는 사업주는 14.5%에 불과했다. ‘갑작스러운 업무량 증가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고 답한 사업주도 33.0%였다. 국정과제로 추진한 근로시간 개편이 현실 파악조차 제대로 안 된 거꾸로 개혁이었음이 입증됐다.

8개월여 만에 다시 나온 정부 정책 방향은 ‘전체 근로시간 유연화’에서 ‘일부 업종·직종 유연화’로 물러선 모양새다. 현재로선 제조업·생산직 등에 한해 ‘주 최대 60시간 이내’로 근로시간을 유연화하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설문조사에서 연장근로 시간 확대가 필요한 업종으로는 제조업, 직종은 설치·장비·생산직이 높게 나타났다. 연장근로 확대 시 상한으로 ‘주 60시간 이내’가 근로자와 사용자 모두 70%대로 많았다. ‘주 69시간 논란’이 불거졌을 때 윤석열 대통령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OECD 38개 회원국 중 다섯번째로 오랜 시간 일하는 나라다. 근면성과 장시간 노동이 우리나라가 압축성장하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선진국에 진입한 뒤에도 여전히 일을 많이 하고 있다. 반면, 또다른 한편에선 아직 일손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는 사업장도 있다.

근로시간을 유연화하면 장시간 근로가 늘어나 건강권이 위협받는다. 필요할 때 좀 더 일하고, 일감이 적을 때 길게 쉬면 된다고 하지만 오랜 시간 집중 근로는 몸에 무리를 준다. 더욱이 일한 만큼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런가 하면 일감을 준 데서 원하는 일시 안에 제품을 만들어줘야 하는 등 특수 상황이 잦은 일부 제조업이 애로를 겪는 것이 현실이다. 

설문조사 결과와 다른 나라보다 오래 일하는 노동시장 여건을 감안하면 근로시간 유연화의 전면 개편은 곤란하다. 다만 특정 업종과 직종을 법으로 정해서 집중 근로를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도 업종·직종별 근로시간 개편에 무리가 없는지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다. 많은 제조업 중 어느 분야인지 구체적 특정이 요구된다. 주 52시간제로 인한 어려움을 추가 인력 채용으로 대응했다는 응답이 36.6%인 점은 근로시간 연장이 만능이 아님을 보여준다. 

정부가 개편안을 내놨지만 내년 4월 총선이 예정돼 있어 그전에 노동계 반발을 무릅쓰고 확정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우선 근로시간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장기적으로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시간적 여유를 갖고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결론을 내는 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순리다.

주간 단위로 관리하는 근로시간을 월이나 반기, 연간 관리로 확대하려던 정부 정책이 무산됐다.[사진=뉴시스]
주간 단위로 관리하는 근로시간을 월이나 반기, 연간 관리로 확대하려던 정부 정책이 무산됐다.[사진=뉴시스]

8개월 만의 근로시간 개편안 수정은 여러 교훈을 남긴다. 정부의 정책 추진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정교하게 실행해야 한다. 관련 데이터와 현장 실태 파악은 필수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편견이나 고집으로 밀어붙이면 부작용을 낳고 좌초하기 마련이다. 민생과 관련된 사안일수록 더욱 그렇다. 

근로시간 변경 문제는 대다수 국민이 당사자로 민생과 직결되고 이해관계도 복잡한 사안이다. 그런 만큼 사회적 합의 과정이 긴요하다. 일손 부족으로 애로를 겪는 중소 제조업 등을 위한 보완책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충분하고 깊이 있게 논의하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래야 관련 당사자들의 수용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탈이 적게 정착시켜 나갈 수 있다.  ​  


양재찬 더스쿠프 편집인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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