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로 한 책은 아래와 같다. 애당초 발표했던 발제문에는 각주를 붙여 일일이 출처를 밝혔지만 각주를 달 수 없는 인터넷 환경이라 책명만 서두에 밝혀둔다. 김근수, 『한국잡지사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정진석 외, 『한국 잡지 100년』, 사단법인 한국잡지협회, 1995. 최덕교 편저, 『한국잡지백년』 1, 2, 3, 현암사, 2005(재판). 4. 암흑기의 대변인 『국민문학』과 『삼천리』 『인문평론』은 그마나 외국의 작품과 문
이순신은 준비에 만반을 기하고 싶었습니다. 경상 우수영과 좌수영이 보내온 정보로 볼 때 일본 전선의 수는 최소 400척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준비한 병력이 28만명이었습니다. 이중 1차 출진 부대의 규모가 15만8800명이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 부대 1만8700명이 타고 온 선박이 700여척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 측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개시 당시 일본 전선의 수가 400척, 500척, 1000척이라는 조선의 기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수군이 수백척 규모라는 사실은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무조건 자신의 명을 따르라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상명上命이 결정되기까지, 부하들과의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래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부터 이순신의 첫 출전까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임의로 해석을 더한 부분은 없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 수록된 이순신의 장계와 「난중일기」 그대로입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간순으로 재배치했습니다.4월 15일 일본군 부산포 도착 2일 후 : 이순신은 영남 우수사 원균과 영남 좌수사 박홍으로부터 각각 통첩을 받았습니다.
이순신은 물길과 뱃길에 밝은 어영담을 중용했습니다. 정박할 필요가 있지만 지리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주변에 탐망선을 깔아놓고 배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순신이 그만큼 지형 정보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보고하기를’ ‘…들으니’ ‘…고 했습니다’ ‘…를 상세히 물으니’ 등입니다. 이순신은 정보에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병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순신 역시 병참을 중시했습니다.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
왜군은 남해안의 한복판인 순천에서 오른쪽 끝인 울산까지 줄줄이 왜성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왜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해안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순천왜성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선 수군 때문에 남해바다 서쪽에는 왜군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은 여전히 왜군의 영향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남해 섬들의 윗길과 아랫길로 퇴군하려고 했습니다. 노량해전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었습니다. 왜군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겨
「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
만약 임진왜란이 서양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승전국은 패전한 침략국에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을 겁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그 액수와 조건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어쨌든 무장강도가 내 집에 침입해서 재산을 갈취한 뒤 ‘이제 돌아갈 테니 더이상 싸우지 말자’고 하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도 결사반대했습니다. 백성을 짓밟은 왜군을 결코 보내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진린도 이
남해 관음포 : 조선의 별이 지다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무술년 10월 17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아니라 후손들이 보관해온 일기는 무술년 10월 12일에 끝납니다. 그 마지막 일기는 단 한 줄이었습니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통영시는 통제영이 있던 도시입니다. 통영시의 일부는 한때 충무시忠武市였습니다. 충무시의 충무는 충무공忠武公에서 왔습니다. 충무 김밥의 유래도 충무시입니다. 통영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선조 39년 1606년,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습니다. 현종 4년 1663년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사액사당이 됐습니다. 사액사당이란 임금이 ‘현판(額)을 내린(賜)’ 사당이라는 뜻입니다. 그 후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통영 충렬사에는 유물 전시관이 부속돼 있습니다. 충렬사 유물 전시
익숙한 단어 몇 개를 떠올려 봅니다. 통영, 충무 그리고 충무김밥. 모두가 임진왜란이나 충무공 이순신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단어를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니, 새삼 신기합니다.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 통제영三道水軍 統制營’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원래 이름은 ‘가배량수’였는데 통제영이 세워진 후부터 통영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였습니다. 삼도三島는 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를 뜻하고, 삼도 수군은 충청 수영ㆍ전라 좌수영ㆍ전라 우수영ㆍ경상 좌수영ㆍ경상 우수영을 의미합니다. 전라
공자의 가르침인 ‘효’는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억압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달랐습니다. 그의 애틋한 효심과 가족애愛는 백성들과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됐습니다. 「난중일기」나 「이충무공전서」에는 하루살이 같은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단호하게 처벌하는 이순신의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랑은 군주와 국가를 향한 충성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 훈련과 전쟁 준비로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
태종 이후에 만들어진 거북선은 시대나 상황ㆍ지역에 따라 모양이나 성능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이런 이유로 거북선을 사진 찍듯이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복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원된 거북선은 당시의 기록대로 실제로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요?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전남 여수의 ‘이순신 자당 기거지’는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습니다.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번이나
[뉴스페이퍼 = 정근우 기자] 푸른 바다를 끼고 보석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경상남도 남해는 서울 및 수도권에서는 다소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찾는 보석같은 여행지다. 특히 요즘과 같은 겨울에는 고요한 정취를 자랑하는 겨울 바다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은 곳이 바로 남해다.볼거리 또한 풍성하다. 최근 남해 관광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노량대교다. 지난 9월, 9년간의 공사끝에 완공된 노량대교는 세계 최초의 기울어진 주탑과 3차원 케이블 등의 첨단기술 도입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남해의
1583년 11월,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73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소식은 2개월 뒤인 1584년 1월 이순신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순신은 즉시 낙향해 3년상을 치렀습니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입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5년 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1597년 4월 11일에 8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순신은 이 사실을 이틀 뒤인 4월 13일에 알게 됩니다. 전쟁 중이다 보니 3년상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일주일이 채 되기 전인 4월 19일에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의 나이 쉰셋이었습니다.이
이순신이 16일간 근무했던 곳 : 사복시 터“본영의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명나라 시랑 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의 말 5필을 중국에 보내기 위해서 올려 보내라는 공문도 왔기에 병방 진무를 보냈다(계사년 5월 12일, 난중일기 중 계사일기).”사복시는 조선시대에 말과 마구, 그리고 목장을 관장하던 관청입니다. 1586년, 이순신은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칩니다. 그리고 부임한 곳이 사복시입니다. 직책은 종6품 주부主簿였습니다. 그런데 사복시에 부임한 지 불과 16일 만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가 됐습니다.
[뉴스페이퍼 = 이승하 시인] 오늘이 ‘독도의 날’이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널리 알리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제정을 기념하는 날이다. 1900년 10월 25일 고종이 공포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도의 날 지정을 제일 먼저 제안한 것은 2000년, 독도 수호 운동을 하고 있던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였다. 10년 뒤인 2010년에 한국시인협회와 독도학회, 한국청소년연맹 등 민간단체가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독도의 날 기념식을 열고 독도의 날을 선포했다. 우리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 : 충무로 인쇄소 골목서울 중구 마른내로 47. 명보아트홀의 주소입니다. 명동성당이 근처에 있고, 백병원도 이 부근에 있습니다. 명보아트홀의 옛 이름은 명보극장입니다. 지금은 CGVㆍ롯데시네마 등에 밀려났지만 예전엔 참 유명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적지 않은 차와 사람들이 명보아트홀 앞을 오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갑니다. 극장 앞에 자리잡은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고: 조선시대에 충무공 시호를 받은 분은 아홉명이나 됩니다. 이
서애 유성룡은 “이순신은 무인이자 장수였지만 그 모습은 선비와 같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의 내용을 다시 보실까요?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순신위인 과언소 용모아칙 如修謹之士 而有中膽氣 여수근지사 이유중담기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다. 용모는 단아하고 곧아서 마치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담대한 기운이 있었다.”과거급제 동기 고상안도 유성룡과 비슷한 의견을 남겼습니다. “이순신 통제사는 나와 과거시험 동기였다. 그래서 여러 날 한 방에서 함께 지냈다. 그의 언변이나 지혜로 볼 때
이순신의 고향은 한양, 오늘날의 서울입니다. 젊은 시절 충청도 아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인 함경도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순신 하면 바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우리 땅 남해 바다 전체가 그의 활동 무대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남해안엔 이순신의 숨결을 느낄 수 곳이 많습니다. 그 남해에 접한 우리 땅은 너무나 아름답습니 다. 이순신이 지켜낸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 자매이고, 친척이며, 친구이자 이웃입니다.이순신의 유적과 발자취는 지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