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커버스토리
視리즈 가로수길의 눈물➊
신사동 상권의 맹주였지만
패션의 성지 무색한 몰락
건물 1층 공실 수두룩해
팬데믹 이후 상권 회복 못해
활성화에 높은 임대료가 발목
바로 옆 세로수길은 핫플 등극
개성 있는 가게 옹기종기 모여
임대료 부담 상대적으로 적어
가로수길 위상 회복할 수 있나

가로수길과 세로수길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더스쿠프 포토]
가로수길과 세로수길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더스쿠프 포토]

# 한때는 패션의 성지였다.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뷰티와 패션의 영감을 얻는 거리이기도 했다. 최근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간판을 떼어낸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는 공실 상가들이 넘쳐나고,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가게에선 상인의 짙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상권이 죽어가는데도 건물주는 높은 임대료를 고집해 상황을 더 나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2023년 겨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얘기다. 

# 한때는 주택가였다. 가로수길의 어두운 뒷골목 취급을 받았다. 최근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골목에 자리 잡은 식당과 서점, 편집숍 등이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덜 부담스러운 임대료 덕분에 다양하고 힙한 아이템으로 무장한 가게들이 골목 여기저기를 채운 게 인기의 원천으로 풀이된다. 2023년 겨울 신사동 세로수길의 얘기다. 


# 더스쿠프가 경제적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신사동을 직접 걸었다. 쇠락하는 가로수길과 번창하는 세로수길의 간격은 50m에 불과했지만, 온도 차는 상당했다. 

19일 늦은 오후, 지하철 3호선 신사역 8번 출구를 빠져나왔다. 수십걸음 끝에 마주한 가로수길 초입은 황량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신나는 캐럴과 화려한 트리로 들떠있어야 할 거리인데도 그렇지 않았다. 가로수길 진입로에 놓인 CJ가로수타운 빌딩은 1층과 2층이 텅 비어 있었다. 

몇걸음을 더 걷자 한 뷰티 브랜드가 매장에 ‘완전폐업’ ‘점포정리’ 인쇄물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채 떨이 제품을 팔고 있었다. 보증금 없이 단기임대 선납 형태의 계약, 이른바 ‘깔세 매장’이었다. 곧이어 마주한 아디다스와 리바이스 플래그십 스토어엔 방문객보다 마네킹의 숫자가 더 많았다. 가로수길이 한때 패션의 성지로 꼽혔던 걸 고려하면 격세지감의 일이었다. 

그나마 건물의 상층부는 상황이 나아 보였다. 중견기업의 오피스나 성형외과, 법무법인, 카페 등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문제는 ‘상권의 얼굴’로 꼽히는 1층이었다. 한집 건너 한집이 공실이었다. 상가 3곳이 나란히 공실인 경우도 있었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거리가 텅 비었는데, 누가 여기서 장사를 하겠다고 오겠나”라고 되물었다. 

가로수길에선 텅 빈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사진=뉴시스]
가로수길에선 텅 빈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사진=뉴시스]

해가 떨어지자 가로수길의 침체는 더 두드러졌다. 마치 슬럼가처럼 1층 곳곳엔 빈 상가들이 수두룩했다. 오랜 시간 공실로 남아있던 탓인지 먼지가 잔뜩 쌓인 바닥을 드러낸 건물도 있었다. 

가로수길의 위기는 36.5%(부동산 컨설팅업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조사ㆍ2023년 2분기 기준)의 공실률이 말해준다. 서울 주요 상권의 평균 공실률이 10% 안팎이라는 걸 고려하면 꽤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만 해도 가로수길의 공실률은 4.5%에 불과했다. 4년 전만 해도 상가가 골목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단 얘기다. 

가로수길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북적이는 매장은 애플스토어였다. 애당초 애플이 가로수길을 한국 오프라인 매장 1호점으로 낙점한 것도 이 거리가 힙하고 쿨한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애플스토어가 2018년에 문을 열었으니 몰락은 불과 몇 년 새 이뤄졌다. 

상권이란 게 원래 그렇다. 부활과 몰락을 반복한다. 죽었다고 여겼던 상권이 호기를 맞아 살아나기도 하고, 지역의 랜드마크로 꼽히던 골목이 악재를 만나 침체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모든 오프라인 상권에 악재였다. 하늘길이 막히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졌던 가로수길의 침체도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악재는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지난해부터 엔데믹(endemicㆍ풍토병) 조짐을 보였다. ‘집콕’에 지친 국민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졌다. 억눌렸던 소비가 터져 나오는 ‘보복 소비’ 열풍을 무기로 서울 주요 상권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펼쳤다. 

그런데 가로수길엔 이런 활기가 감돌지 않았다. 살아날 타이밍인데도 되레 숨을 죽였다. 오히려 올해 초부터 ‘자라’ ‘스파오’ ‘후아유’ ‘어라운드코너’ 같은 주요 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스토어가 상권에서 철수하면서 침체 장기화의 신호탄을 쐈다. 이들은 양질의 임차인이면서도 가로수길이 패션의 성지로 불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매장들이다. 

가로수길이 몰락한 이유는 높은 임대료 탓이 크다. 서울시가 조사한 ‘2022년 상가임대차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가로수길의 통상 임대료(월세ㆍ보증금 월세전환액ㆍ공용관리비를 합친 금액)는 1㎡당 8만6900원으로 전년보다 8.8% 상승했다. 이 지역의 점포당 평균 전용 면적 120㎡(36.3평)를 적용하면 월평균 임대료는 1042만원에 이른다. 애플스토어를 기준으로 중심지에 있는 상가는 3.3㎡(1평당) 임대료가 120만원을 훌쩍 넘는 경우가 다반사다.

공실이 쌓여도 임대료를 자진해서 내리는 건물주는 드물었다. ‘한번 내리면 끝’이란 심리와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임대료를 떠받치는 축으로 작용했다.  

■ 세로의 성공 = 가로수길을 빠져나와 이번엔 ‘세로수길’을 갔다. 세로수길은 가로수길의 서쪽 평행도로 일대를 일컫는다.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기 때문에 가로수길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가로수街路樹 대신 좌우로 나 있는 방향을 뜻하는 ‘가로’를 ‘세로’로 비틀어 재치 있게 명명했다. 

세로수길은 ‘힙한 상권’의 덕목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뷰티와 패션, 문구 등 다양한 장르의 리테일숍이 눈에 띄었다. 요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라는 ‘하이볼(위스키에 탄산수를 넣은 칵테일)’을 전문으로 다루는 펍도 여럿 보였다. 가로수길에선 몇걸음마다 보이는 공실을 이 거리에선 찾을 수 없었다. 

십수년 전만 해도 세로수길은 주민 대상의 슈퍼마켓이 모여 있는 ‘동네 상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인근 가로수길의 임대료가 급등하자 상인들이 세로수길까지 흘러들어왔다. 감각 있는 인테리어를 적용한 이국적인 분위기의 술집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골목이 북적대기 시작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침체에 빠지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엔데믹 이후론 신사동 오피스 수요를 흡수하면서 빠르게 부활했다. 현재 세로수길 상권의 온기는 메인스트리트뿐만 아니라 그 옆에 모세혈관처럼 이어진 골목을 따라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인근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가로수길 상권 임대료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상인들이 하나둘 세로수길까지 밀려들어 왔다”면서 “지금은 임대 매물 자체가 많지 않지만 가로수길과 비교하면 세로수길 상권의 임대료는 3분의 2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건물주들이 임대료 수준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어서인지 지금도 빌라나 다가구주택을 리모델링한 상가가 꾸준히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 가로의 반격 = 그렇다면 가로수길은 이대로 신사동 상권의 맹주 자리를 세로수길에 넘겨줄까. 그렇지만은 않다. 가로수길도 반격의 고삐를 조금씩 조이고 있다. 

최근 이 상권에선 협동조합을 구성해 상권 활성화를 꾀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몇몇 건물주와 임차회사들이 중심이 됐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어느 컨설팅 회사 대표는 “임대료를 하향 조정하고 새로운 골목 문화를 조성하겠단 의지가 있는 가로수길 관계자가 모였다”면서 “패션을 중심에 두기보단 새로운 콘텐츠로 상권의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세로수길은 신사동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세로수길은 신사동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애플스토어 1호점이 건재하다는 점에서 가로수길은 아직 상권의 명성을 이어갈 동력은 갖고 있다. 아무리 죽었다고 해도 이곳에 둥지를 마련한 유명 브랜드도 아직 적지 않다. 2021년엔 스웨덴 H&M 그룹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아르켓’이 플래그십 매장을 오픈했고, 지난해엔 프랑스의 유명 향수 브랜드인 ‘딥디크’가 글로벌 최대 규모의 매장을 열었다.

다만 이전의 지위를 온전히 회복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무엇보다 임대료 정상화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건물주가 여전히 많다는 게 문제다. 숱한 공실이 상권 침체 장기화의 방아쇠로 작용할 공산도 크다.

2023년 겨울, 가로수길에서 가장 화려한 건 시민들이 직접 가로수에 짜 입힌 형형색색의 뜨개옷이다. 시민들이 없었다면 가로수길은 ‘초라한 민낯’을 그대로 노출했을지 모른다. 가로수길엔 봄이 찾아올 수 있을까.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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