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한다면서 대놓고 칼 갈아서야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프레임은 ‘극일克日’이다. 국민들은 일본의 무역보복 행위에 분노를 표출했고, 정부는 극일 의지를 드러냈다. 문제는 이런 의지가 성과를 낼 수 있느냐다. 경제학자들은 “극일은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숨죽이고 인내하면서 방안을 세운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칼을 갈면 부메랑을 맞을 것이란 경고가 많았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학자 4人에게 극일의 방법을 물었다.

정부가 꺼내든 극일 대책은 기술력이다. 국내 소재ㆍ부품산업을 육성해 일본 제품을 대체하겠다는 거다.[사진=연합뉴스]
정부가 꺼내든 극일 대책은 기술력이다. 국내 소재ㆍ부품산업을 육성해 일본 제품을 대체하겠다는 거다.[사진=연합뉴스]

‘일본을 이기자’는 뜻의 극일克日. 현재 우리나라 정부 정책의 기조는 사실상 극일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2일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ㆍ수출 절차 간소화 우대국) 명단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같은날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는다”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본을 이기자는 걸까. 정부가 내놓은 답은 기술력이다. 국내 소재ㆍ부품ㆍ장비업체의 기술력을 키워 일본 제품 의존도를 낮추는 게 이기는 길이라는 것이다. 지난 7일 문 대통령이 한 중소부품업체를 방문해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노력해 달라”고 격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체적인 방안도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을 비롯한 관계부처 장관들이 ‘대외 의존형 산업구조 탈피를 위한 소재ㆍ부품ㆍ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놨다. 골자는 “수출제한 3대 품목(고순도불화수소ㆍ플루오린 폴리이미드ㆍ포토레지스트)을 포함한 100개 핵심품목에 집중 투자해 5년 안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업들에 재정지원과 세제혜택, 규제완화 등의 유인책을 제공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요기업과 공급기업 간 상생ㆍ협력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도 구축할 계획이다. 분명 잘못된 방향은 아니다. 일본의 수출규제 압박에 우리나라가 이처럼 휘둘리고 있는 건 그만큼 일본 의존도가 높다는 방증이다. 국내 기술력을 키우고 국산화율을 높이는 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 중 하나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전문가들에게 극일하기 위한 방안을 물었을 때도 소재ㆍ부품ㆍ장비산업을 육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극일이 한국사회 전반의 프레임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국내 소재ㆍ부품산업의 취약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면서 “(극일하려면) 최종재 산업은 발전한 반면, 부품산업은 왜 발전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소재ㆍ부품산업을 육성하려면 먼저 산업이 크지 못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박 교수는 “대기업(수요기업)들이 세컨드소스(제2공급기업)를 간과했던 게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기업의 리스크를 줄이고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선 세컨드소스를 둬야 하는데, 단일한 공급자에게만 의존했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대기업이 제2ㆍ제3의 공급자를 두기 위해선 더 많은 소재ㆍ부품업체를 확보하려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산업이 발전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대기업의 역할을 강조했다. 박재근 한양대(융합전자공학) 교수는 “일본이나 미국의 대기업들이 점유하고 있는 소재ㆍ부품시장을 뚫기 위해선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 혁신기업을 이끌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대기업이 중소 소재ㆍ부품업체에 투자하고, 해당 제품을 활용할 수 있도록 유인책을 제공하는 정부 정책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대기업에 지나치게 혜택을 몰아주는 것은 우려스럽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소재ㆍ부품산업이 크지 못한 건 대기업이 독점적인 지위를 남용해왔기 때문이다. 소재ㆍ부품업체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대기업 지원을 늘리면 대ㆍ중소기업 간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란 거다. 

일본 정부는 백색국가 명단에서 한국을 제외했다.[사진=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백색국가 명단에서 한국을 제외했다.[사진=연합뉴스]

박상인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국내에선 대기업들의 수요독점이 강하기 때문에 부품업체들을 쉽게 컨트롤할 수 있다. 기술력이 필요한 제품은 일본에서 사오고, 그렇지 않은 제품은 국내 업체들로부터 단가를 낮춰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중소업체들이 혁신할 여력은 없다. 지금은 대기업들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반짝 협력해도 단가후려치기나 기술탈취를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도루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양채열 전남대(경영학부) 교수의 지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극일 대책이 기업 간의 불균형을 불러와선 안 된다는 거다. 양 교수는 “이번 일로 공정경쟁문제가 뒤집힐까 걱정된다”면서 “기존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기업들에 유리하게 흘러갈 수 있는데, 중소기업과 신규 진입 기업 등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지 않는 곳들도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참에 부처간 불통이란 고질병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익성 동덕여대(EU통상)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없고, 부처 간 개별적으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과기부는 기술만, 중기부는 지원방안만, 산자부는 구조적 문제만 다룬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무역 문제는 10년 전에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기술이 부족하고, 수준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정확히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다룰 만한 통합 조직이 없어서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이런 통합 조직은 반드시 필요하다.”

중장기 대책만 있을 뿐 단기대책은 전무하다는 지적도 숱하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품목별 안정적으로 공급이 이뤄지는 시기는 1년에서 5년 사이다. 전문가들은 “매우 낙관적인 전망이지만 그마저도 짧은 기간은 아니다”면서 “그동안 기업들이 볼 피해와 불안, 산업 경제에 미칠 영향과 관련한 단기대책은 미미하다”고 꼬집었다. 

소재ㆍ부품산업을 육성하는 게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받쳐줄 단기대책이 없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박상인 교수는 “단기대책 없이 중장기대책만 말하는 건 대책이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면서 이렇게 꼬집었다. “실질적인 문제는 외교문제에서 비롯됐다. 일단 외교문제에서 국익을 지키면서 타협책을 만들어야 한다. 소재산업 육성에 5년이 걸린다고 하면 그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거다. 극일하려면 칼을 갈고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정부가 결연하게 극일 의지를 다졌지만, 아직 엉성한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진짜 극일을 원한다면 냉정하게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거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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