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4월 9일. 명나라 장사꾼 심유경은 왜군의 수장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심유경은 “한양에서 물러간다면, 조선의 남삼도를 풍신수길의 영토로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조선 조정은 애먼 결정만 내리고 있었다. 밀실 합의의 폐단을 극단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대부분 신당 창당 건이고 대부분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들은 누굴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가. 왜군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우선 군량미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 심각했다. 병력도 왜란 초기에 비해 절반이나 줄었다.
지구 온도가 오르면서 세계 곳곳에서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엔 ‘매미나방’ 유충 수가 전국적으로 가파르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 벌레는 나뭇잎을 닥치는 대로 갉아먹는 데다 몸에 닿으면 피부질환을 일으켜 해충으로 분류됩니다. 국내엔 마땅한 천적이 없어서 대처하기도 쉽지 않답니다. 지구를 이대로 둔다면 매년 도심을 가득 메운 나방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nungnunge8@gmail.comhttp://instagram.com/nungnungehttp://www.nungnunge.com글 =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lhk@thes
유충 굳이 웨딩 사진을 버린 이유 말입니까? 글쎄요. 선생님이라면 그 액자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쁘게 포장해서 재혼한 엄마에게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지금까지 저 같은 인간의, 비틀린 진술이 녹취된 테이프를 수천 개는 들어왔다고 했죠. 일 때문이든 아니든, 그 정도면 이미 선생님 안에도 괴물이 자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그 테이프들을 들을 때만 살아있다는 실감이 들지도 모르죠. 아니면 그것들을 듣지 않고서는 흥분하지 못하던가. 선생님은 아무리 봐도 이성에게 인기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그 테이프들을 들으며
울산성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식수는 끊겼고, 먹을거리는 떨어졌다. 더구나 명병이 에워싸고 있어, 돌진할 틈도 없었다. 일본군 참모총장인 흑전효고는 각처로 통지해 구원병을 불러 울산으로 보냈다. 소조천수추,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등의 무리가 언양, 밀양으로부터 길게 달려 울산으로 합류했다. 울산성을 지키던 가등청병위는 명병
심유경과 이여송은 일본군과 화의를 하고, 제멋대로 남삼도를 허락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에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유성룡 등 조선 대관들이 화의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반대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목소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1592년 4월 일본군 수륙부 약 15만명이 부산포에 건너온 이래로 1년 동안 일본군은 조선 7도에
이순신은 적군이 전라도로 들어올 수 있는 육로를 지키고 있었다. 광주목사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을 선봉으로 삼아 진산珍山의 이치(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와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 남쪽 사면의 배티재)를 지켰다. 이순신에 질린 일본군이 권율이라는 또 다른 명장과 만나기 일보 직전이었다.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금성ㆍ김화金化 양읍을
진린은 순신이 제 공을 자기에게 양보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내조흡 강린약 등을 살려주고 분함과 부끄러움이 풀려서 순신의 손을 잡으면서 “내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장국의 대명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오!”하였다. 그날 저녁에 내유격 왕유격 강천총 정천총을 위시해 명나라 제장들은 패군한 죄를 면한 것을 순신의 은덕이라 하여 그 오만하던 놈들
이순신 혼자서도 넉넉히 적의 수군을 막을 만한 능력이 생겨난 이때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수군과 병선 70여척을 끌고 강화도에서 내려온다고 소식이 왔다. 이름만은 청병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순신의 행동을 견제 또는 간섭해 적을 놓아 보내고 마침내는 순신을 관음포에서 죽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정은 부하제장의 주장을 물리쳐 말하기를 “울산성에
막내 이면은 나이 스물하나요, 아직 총각이었다. 혈기가 넘치고 말타기, 활쏘기와 검술에 정통하였으며 무용이 절륜하여 그 부친의 풍도가 있었다. 순신도 항상 자기를 닮은 것을 더 사랑하였다. 이면은 신주와 모친 방씨와 집안사람들을 피난가게 하고, 자신은 7척 장검을 들고 적병이 온다는 곳으로 마주 나갔다. 남원 선비 조경남趙慶男은 충의지사였다. 의병을 일으켜
권율은 순신의 충고하는 말의 진의와 요령을 깨닫지 못하였다. 순신은 자기의 과거의 죄명을 변경하자는 것도 아니요, 또 원균을 두호하자는 것도 아니요, 오직 국방대책의 이해득실만 말한 것으로 광명정대한 사리를 풀어 말한 것이건마는 권율은 처음에는 그 과거의 죄를 변명한다고 듣고 노하였다가 나중에는 원균을 두호하는 줄로 듣고 그래도 순신은 관대하다고 하여 탄복
적은 물러가지 아니하여 정히 위급하던 판에 전일 이순신의 조방장이던 충청수사 정걸이 권율의 위급함을 알고 화살과 군량을 배에 실어 산성 절벽 밑에 들어와 구원했다. 이 행주 싸움은 정걸의 화살 보급이 없었으면 실패할 뻔했다. 의외의 원조를 얻은 피폐한 사졸은 100배의 용기를 냈다. 계사1593년 2월 12일에 한성에 있는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치기로 의결하
승장 영규는 계룡산에서 기의하고 의병장 조헌과 동의해 금산 싸움에 순절했다. 수군대장 이순신의 부하에도 벌써부터 승군을 뒀는데 이순신의 충의와 용략에 감동해 일어난 것이었는데 그 수가 400여명에 달했다. 순신은 일일이 부서를 정해 전라도로 들어올 육로 요해처에 복병하게 했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금성1) 김화金化 양읍 간에서 옮겨 다니며 여러 번 흩어져
인천 서구의 한 고등학교 2학년 여고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서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올해 들어 인천지역에서만 벌써 다섯 명의 중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천 서구 모 고등학교 2학년 A양은 지난 15일 밤 10시 야간자율학습이 끝났지만 귀가하지 않고 교실에 남았다. 가족에게는 “친구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미리 연락을 남긴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