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2편 잘못된 과거의 응시
오에 겐자부로 「만년양식집」
일본 노벨문학상 작가의 죽음
형식적인 애도만 표현한 日 정부
재무장 반대 운동 펼쳤기 때문
전쟁 비극 소설의 주제로 승화
2013년 절필 후 사회활동 참여
일본 우경화 우려한 진짜 지식인

# 2023년 3월 눈을 감은 작가 오에 겐자부로. 일본인으로선 두번째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를 불편하게 여겼다. ‘제국 일본’의 잘못을 끈질기게 직시하면서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 작가 오에는 역사를 숨기지 않고 바라보는 용기를 가져야 희망을 품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보수든 진보든 집권만 하면 역사를 바꾸려 하는 우리네 권력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일본인들이 ‘헌법의 날’을 맞아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 수호를 위한 대규모 집회가 열고 있다.[사진=뉴시스]
일본인들이 ‘헌법의 날’을 맞아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 수호를 위한 대규모 집회가 열고 있다.[사진=뉴시스]

2023년 연말, 한 작가를 다시 기억한다. 지난 3월 3일,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사망했다. 오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인으로선 두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의 죽음에 형식적인 애도만 표명했다. 이유는 간명하다. 일본 정부는 그를 불편하게 여겼다. 일본에 노벨문학상을 안긴 작가였지만, 오에는 끈질기게 일본의 과거를 응시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범죄를 파헤쳤고,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하면서 동료 작가들과 평화헌법 9조를 수호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2011년 동아시아 대지진이 발생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사람들은 오에의 작품을 입에 올렸다. 

1935년생에 출생한 오에는 10살 때 종전終戰을 맞이했다. 어린 소년에게 종전은 ‘해방’에 가까웠다. 일본은 신사참배를 중단했고, 일본인들이 그토록 숭배한 천황은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갔다. 오에의 세대는 군국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첫 세대였다. 동경대 불문과에 진학한 오에는 미군 비행장 확장에 반대하는 ‘스나가와’ 투쟁에 앞장서는 등 사회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1957년 3학년 재학 중 ‘동경대 신문’에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소설을 게재해 ‘오월제상’을 받았다. 이듬해 「사육」으로 일본에서 제일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서 오에는 20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발돋움했다. 초기 오에 소설의 주요 화두는 ‘무기력한 청년’이었다. 소설의 소재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1960년 17살 일본 고등학생이 도쿄 전철역에서 일본 사회당 대표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천황숭배사상에 빠진 청소년이 진보당 정치인을 살해한 이 사건으로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지난 2일 60대 남성이 부산을 방문 중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목을 흉기로 공격한 사건에 빗대보면, 그 충격을 짐작할 만하다.

오에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중편소설 「세븐틴」 「정치소년 죽다」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열등감에 빠진 고등학생이 천황 찬양 집회에 참여해 자존감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풍자소설이었다.

이때부터 오에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얼마 후 오에는 또 다른 시련을 겪었다. 1963년, 장남 히카리를 얻었지만, 아이는 두개골에 이상을 안고 있었다. 머리의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히카리는 정상적인 지능을 잃고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됐다. [※참고: 청각이 발달한 히카리는 훗날 작곡가가 됐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2015년 소설 「익사」를 발표했을 때 국내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사진=뉴시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2015년 소설 「익사」를 발표했을 때 국내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사진=뉴시스]

오에는 절망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기형의 자식을 맞이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 「개인적인 체험(1964년)」을 발표하고, 이듬해에는 원폭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르포르타주 「히로시마 노트(1965년)」를 출간했다. 개인의 비극과 인류의 비극에 침묵하지 않고 결연히 맞서겠다는 오에의 의지는 아들을 맞이한 이후에 더욱 강해졌다. 

오에는 장애아를 키우는 개인적인 비극과 전쟁이라는 인류의 비극을 자기 소설의 주제로 발전시켰다. 핵전쟁의 위기를 피해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 ‘진’과 함께 대피소로 피신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소설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1973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올해 번역 출간한 이 소설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문제로 갈등이 커지던 상황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5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 지닌 놀라운 동시대성 때문이었다. 

1994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오에는 자기보다 앞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판했다. 일본의 과오를 기억하는 자신은 ‘일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동의할 수 없다는 연설을 한 것이다.

또한 일본 천황이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수여한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거부했다. 그는 ‘전후 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에 앞서는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오에는 다시 일본 극우세력의 표적이 됐다. 오에는 굴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노벨상을 수상한 직후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구속된 작가 황석영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냈고, 소련 작가 솔제니친의 석방 탄원 운동에도 참여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일본 정부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자 오에는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반대하며 가토 슈이치(1919~2008년), 우메하라 다케시(1925~2019년) 등 동료 작가들과 함께 평화헌법 9조 수호모임을 결성했다.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도, 경기 침체로 사회적 활력을 잃은 일본 사회는 점차 우경화했다.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를 특히 혐오하는 극우단체 ‘재특회’가 세력을 확장했고, ‘옴진리교’처럼 극단적 테러를 자행하는 종교단체가 늘어났다.

오에는 일본이 냉전 질서에 편승해 경제 성장만을 추구하다가 과거를 반성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익사」 「만년양식집」 등 말년의 작품에는 그의 회한이 짙게 깔려 있다. 

오에는 2013년 이후 절필을 선언하고 사회활동에 매진했지만, 결국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오에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쓴 소설 「만년양식집」의 말미에는 주인공 ‘조코 코기토’가 첫 손자를 맞이하며 쓴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에는 아들 히카리를 맞고서 오에가 품었던 결연한 희망과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갈망이 담겨 있다. “작은 아이들에게 노인은 답변하고 싶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 그는 ‘작가’이자 ‘지식인’이었고, ‘아버지’였다. 그 앞에 기꺼이 ‘위대한’이라는 낡은 수식을 헌사하고 싶다. 한 사람이 떠났고,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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