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9편 카렐 차페크의 삶과 문학
체코의 국민 작가 카렐 차페크
인간 모습의 로봇 최초 묘사
인간의 노예에서 반란군으로
파시즘 겨냥한 작품 내기도
생성형 AI가 대세로 떠오른 지금
다시 곱씹어보는 차페크의 문학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작품들은 지금 읽어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가 최초로 사용한 단어인 ‘로봇’과 인간 같은 곤충들, 인간에 의해 강제로 대량 증식된 도롱뇽, 전염병을 권력 수단으로 이용하는 독재자는 세계대전 당시의 세계와 지금 우리의 세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세계가 전체주의에서 기인한 전쟁으로  얼룩지고 있다. [사진=뉴시스]
세계가 전체주의에서 기인한 전쟁으로 얼룩지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터미네이터(1984년)’는 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그린 대표적인 영화다. 자원을 낭비하고 서로 갈등만 일삼는 인간들이 쓸모없다고 판단한 ‘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디스토피아 영화의 고전이 된 이 영화의 상상력은 감독의 독보적인 전유물이 아니다. 영화의 저변에 깔린 상상력은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가 카렐 차페크(1890 ~1938년)에게 빚지고 있다. 카렐 차페크는 최초로 ‘로봇’이라는 말을 사용한 작가였다. ‘로봇’은 체코어로 ‘노동’을 뜻하는 단어 ‘robota’에서 비롯됐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를 그린 차페크의 작품들은 두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창작됐다.

체코 크로코노셰에서 태어난 카렐 차페크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문학적인 풍토에서 성장했다. 뛰어난 이야기꾼인 외할머니는 손자들에게 속담, 민요, 전설 등을 알려줬다, 미술과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형 요제프도 차페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두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창작하면서 이야기에 어울리는 삽화를 그렸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차페크가 세계적인 작가가 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1909년, 명문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차페크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카렐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차페크는 베를린대학과 파리 소르본대학에서도 여러 과목을 수강했고, 두각을 나타냈다.

학자가 되고자 했던 차페크의 바람은 전쟁으로 깨졌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한 전쟁이었다. 기관총, 독가스, 탱크, 잠수함, 폭격기가 등장했고, 과학은 더욱 효율적인 살상을 목표로 발전했다. 차페크는 다행히도 척추 질환으로 징집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는 전쟁의 참상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유럽이 그토록 자랑했던 ‘이성에 근거한 확실성의 세계’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체코에 독립을 가져다줬고, 차페크가 유명 작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1920년, 차페크는 희곡 「R.U.R: 로섬의 만능 로봇」을 발표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희곡은 형 요제프와 공동작업을 거쳐 1921년에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초연했다. 

지능을 가진 로봇을 이용해 인류가 노동에서 벗어난다는 작품의 설정은 당시 1920년대에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과학자 ‘로섬’이 발명한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육체노동과 사무 활동까지 대신하고, 군대의 병사까지 로봇으로 채워진다. 로봇 제조회사는 크게 번성하고, 인간들은 로봇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최근 AI 기술은 인간의 창작 능력까지 습득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최근 AI 기술은 인간의 창작 능력까지 습득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멸절하고 이 과정에서 로봇 제작과정이 담긴 설계도까지 불타버린다. 이런 세계에서 손으로 일하는 인간 ‘알퀴스트’만 살아남는다.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로봇을 수리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시키지만, 설계도가 소실된 상황에서 그는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한다. 수리 불가로 로봇 세계 역시 위기에 빠진다. 

우연히 한 쌍의 젊은 로봇이 희생정신과 사랑의 감정을 습득하는 것을 발견한 알퀴스트는 그들을 새로운 아담과 이브로 명명한다. 대량생산과 맹목적인 과학기술, 전체주의를 비판한 이 희곡에는 암울한 미래를 향한 차페크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경제 대공황이 시작했고, 유럽 곳곳에는 전체주의가 득세했다. 불평등과 차별, 인종주의와 전체주의가 만연한 이 시기에 차페크는 많은 희곡과 소설을 집필했다.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은 형 요제프와 함께 창작한 「곤충극장」이었다. 곤충의 세계를 여행하게 된 인간 관찰자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 연극은 곤충들의 습성을 통해 인간들의 부조리한 욕망을 풍자한다. 

무가치한 똥에 일생을 다 바치는 쇠똥구리, 타자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아 연명하는 말벌들, 무분별한 성적 유희에 삶을 탕진하는 나비들, 조직적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살상에 중독된 전투개미 등 「곤충극장」에 등장하는 무수한 곤충들은 모두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이 연극은 오늘날까지 체코 연극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았다. 희극과 풍자, 부조리가 가득한 이 연극은 연출에 따라 무한 변주가 가능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인간을 곤충에 빗댄 「곤충극장」은 당대 체코의 인기 작가였던 프란츠 카프카(1883~1924년)의 대표작 「변신(1916년)」의 설정과 흡사하지만, 카프카와는 달리 차페크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차페크는 불멸하는 존재의 지루한 삶을 다룬 희곡 「마크로풀로스의 비밀(1922년)」에서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나약하기에 더 아름답다고 역설했다.

1930년대에 차페크는 현실로 다가온 전체주의의 위험을 자각하면서 소설 「도롱뇽과의 전쟁(1936년)」과 희곡 「하얀 역병(1937년)」을 집필했다. 탐욕스러운 자본가가 기른 도롱뇽이 대량으로 증식해 인간 세계를 위협한다는 내용을 담은 「도롱뇽과의 전쟁」은 명백히 독일 파시즘을 겨냥한 작품이었다. 「R.U.R: 로섬의 만능 로봇」의 문제의식을 확장한 이 작품의 설정은 오늘날까지 숱한 SF영화의 토대가 됐다. 

「하얀 역병」에는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을 통치 수단으로 악용하는 독재자가 등장한다. 전염병으로 증폭한 대중들의 공포와 불만을 전쟁의 동력으로 삼는 독재자, 방역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타락한 의사들의 모습은 팬데믹을 겪은 오늘날의 풍경과도 비슷하다.

1936년, 스웨덴 한림원은 수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차페크에게 상을 수여하는 문제를 두고 고심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했던 한림원은 여러 작품에서 독일 파시즘을 강력하게 비판한 차페크에게 상을 주는 것을 꺼렸다. 한림원은 차페크에게 정치색이 짙지 않은 작품을 집필하면 노벨문학상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차페크는 즉각 거절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차페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독일의 체코 수데테란트 병합을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하자 차페크는 프라하 국제펜클럽 총회에서 독일의 침략을 경고하면서 뮌헨 회담에 항의하는 체코 작가 성명서를 대표로 집필했다. 

그러자 독일 비밀경찰은 차페크를 ‘공공의 적 3번’으로 지목했다. 주변인들이 차페크에게 영국으로 망명할 것을 권했지만, 차페크는 체코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전쟁이 임박한 1938년 12월, 차페크는 인플루엔자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다음해 체코에 진주한 독일 비밀경찰은 차페크가 사망한 사실을 모르고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차페크의 형 요제프는 곧 체포돼 베르겐-벨젠(Bergen-Belsen) 강제수용소로 이송됐다. 요제프는 1945년 4월, 전쟁이 끝나기 불과 3주 전에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차페크의 작품들은 지금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AI가 인간의 창작 능력까지 답습하고 예술가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지금의 현실은 차페크의 텍스트들을 다시 소환하게 한다. 과학 기술은 과연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 편리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면서 인간은 사유하는 능력을 스스로 말살한다. 인간보다 명석한 기계를 만든 인류의 아이러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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