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尹의 처방전❼ 반도체
국가대항전으로 번진 반도체 경쟁
메모리 외에는 위태로운 韓반도체
‘반도체 초강대국’ 만들겠다던 尹
디테일 없이 ‘복붙’한 반도체 전략
일관된 기조 없이 정책 오락가락
세계 반도체 싸움서 승산 있을까

반도체 시장의 구도가 ‘국가 대 국가’로 확전 양상을 띠고 있다. 세계 각국은 경쟁하듯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을 꺼내들고 있다. 시스템반도체가 약한 우리나라도 반전을 만들 ‘한방’이 필요하다. 반도체 초강대국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윤석열 정부가 꺼내든 전략은 과연 어떨까. 아쉽게도 반전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K칩스법의 내용이 180도 달라졌다.[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K칩스법의 내용이 180도 달라졌다.[사진=연합뉴스]

지금 반도체 시장은 춘추전국시대다. 세계 경제를 뒤흔든 반도체 공급난, 첨단기술 기반의 산업 패러다임 변화는 반도체를 세계 경제안보의 중심에 올려놨다. 미래 산업, 나아가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선 반도체 패권을 쥐는 게 우선 순위가 됐다. 

이런 맥락에서 ‘반도체 키우기’가 세계 각국의 지상 과제로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반도체 산업 육성은 더 이상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닌 주권에 관한 문제”라고 설파했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의 말처럼 반도체 시장의 구도가 ‘기업 대 기업’에서 ‘국가 대 국가’로 확전했기 때문이다. 

먼저 치고 나간 건 미국이었다.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줄곧 강조하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반도체칩과 과학법(칩스법)’에 최종 서명했다.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 내용이 골자였는데, 반도체 분야에만 편성한 예산이 527억 달러(약 65조원)에 달했다. 특히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25%의 세액을 공제해주는 등 달콤한 인센티브를 약속한 덕에 벌써부터 내로라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으로 모이고 있다.

유럽, 대만, 일본, 중국도 서둘러 미국의 뒤를 쫓았다. EU는 지난해 11월 430억 유로(약 58조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반도체법(ECA)’을 통과시켰다. 현재 9% 수준인 반도체 시장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높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일본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속도를 냈다. 지난해 TSMC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6170억엔(약 6조원)을 쏟아부은 데 이어, 2차 추가경정예산안에 반도체 관련 예산 1조3000억엔을 포함했다.

대만은 대만판 반도체법(연구ㆍ개발 투자비 25%ㆍ설비투자비 5% 세액공제)으로 통하는 ‘산업 혁신 조례 수정안’을 올해부터 시행해 반도체 산업을 지원 사격하고 있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며 반도체 굴기屈起를 내세운 중국의 목표도 아직 유효하다. 

반도체를 국가 경제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도 심상찮은 시장 분위기를 예민하게 살피고 있다. 종합 반도체 시장점유율 19.9%(옴디아ㆍ2021년 기준)에 이르는 반도체 강국이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게 우리나라 반도체의 애매한 위치다. 사실상 메모리반도체(시장점유율 59.1%)를 빼면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육성 정책을 담은 ‘반도체칩과 과학법’에 서명했다.[사진=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육성 정책을 담은 ‘반도체칩과 과학법’에 서명했다.[사진=뉴시스]

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 외에도 시스템반도체(설계ㆍ생산), 소재ㆍ부품ㆍ장비(소부장), 후공정(OSAT)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 그중에서도 미래 산업의 태동과 함께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고 있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경쟁력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의 시스템반도체 시장점유율은 미국(69.1%), 대만(11.0%), 유럽(8.6%), 일본(4.8%), 중국(3.3%)에 밀린 3.0%에 그쳤다. 소부장과 후공정 분야 경쟁력도 저조하긴 마찬가지다.[※참고: 산업통상자원부와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2021년 반도체 산업 경쟁우위 평가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종합 반도체 경쟁력 순위는 미국ㆍ중국ㆍ대만ㆍ일본ㆍEU를 포함한 총 6개국 가운데 5위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안이 본격화하면 격차는 더 벌어질 게 불보듯 뻔했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손 놓고 불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가장 먼저 반도체 산업을 살폈다.

지난해 7월 내놓은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이 그 결과물인데, ▲인프라 구축 지원과 세제혜택 확대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반도체 특성화대학원 신규 지정ㆍ반도체 브레인 트랙 운영 등을 통한 반도체 인력 15만명(10년간) 양성 ▲전력ㆍ차량용ㆍ인공지능(AI) 반도체 예비타당성 사업 추진 및 지원 ▲인허가 신속 처리 ▲시스템반도체 시장점유율 2030년 10% 달성 목표 수립 ▲소부장 자립화율 2030년 50% 달성 목표 수립 등이 골자다.

윤 정부의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은 분명 우리나라 반도체의 고질적 약점인 인력ㆍ인프라 부족 문제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려스러운 점은 있다. 좋은 건 다 가져다 놓은 ‘백화점식’ 정책 가운데 실제로 이행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정책보다 더 중요한 건 정책을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냐는 점”이라면서 “원래 취지에 맞게 이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윤 정부의 ‘반도체 플랜’은 피상적 대책에 그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예컨대 시스템반도체 설계 분야는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한 메모리반도체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설계ㆍFoundry)와 달리 ‘다양성’을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중소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업체ㆍFabless) 업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윤 정부의 정책엔 이런 ‘세심함’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참고: 우리나라의 팹리스 수는 130여개다. 팹리스 수가 2800여개에 이르는 중국보다도 한참 적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실 지원금이나 세제혜택이 더 절실한 건 대기업보다 중소 팹리스나 소부장 기업들”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반도체 지원 법안이 통과되면 조례나 시행령을 만들어 중소기업이 더 많은 혜택을 받도록 법 적용범위를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실제로 중소기업 중엔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흔하다. 가령, 규모가 작은 소부장 업체 중에는 반도체에 필요한 제품을 만들지만 ‘반도체 제조업체’에 포함되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런 기업들은 설비를 투자해도 ‘설비투자’ 관련 지원을 못 받을 공산이 크다.”

윤 정부의 반도체 정책에서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문재인 정부의 ‘K반도체 전략’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거다. K반도체 전략의 주요 골자는 ▲반도체 R&Dㆍ시설투자 세액공제 확대 ▲전력ㆍ용수 등 인프라 지원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인허가 신속 처리 ▲반도체 학과 정원 조정ㆍ계약학과 신설을 통한 인력 양성 ▲반도체 특별법 제정 등이다. 두 정부의 정책 내용만 보면 어느 정부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윤 정부의 정책을 두고 우려와 아쉬움을 드러냈다는 건 앞선 문 정부의 정책에도 개선할 점이 있었다는 걸 방증한다.

반도체 산업과 수요 산업 간의 연계, 이종異種 산업 간 협업,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규제로 인한 피해 등 현실적인 이슈와 관련해서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이전 정부의 정책과 반도체 산업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해 정책을 보완ㆍ개선하려는 노력이 크지 않았다는 건데, 이는 윤 정부만의 색깔이 뚜렷하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이종환 상명대(시스템반도체공학)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시스템반도체를 육성하겠다고 대대적으로 공표를 한 이후로 벌써 수년이 흘렀지만 냉철하게 봤을 때 경쟁력의 변화는 크게 없다”면서 “현재 필요한 건 ‘몇 퍼센트를 달성하겠다’ ‘몇명을 양성하겠다’는 등의 숫자놀음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디테일을 챙기는 거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위해선 직접 현장을 돌아보고 기업ㆍ대학ㆍ연구기관 등과 함께 반도체 생태계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반도체 정책에 뚜렷한 기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지난 3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세액공제율 조정안에서도 드러났다. 지난해 12월 23일 국회를 통과한 ‘반도체 특별법(K칩스법)’에 담긴 내용은 대기업의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기존 6%에서 8%로 높인다는 거였다. 당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야당이 각각 20%, 10%를 제안했지만, 세수 감소를 우려한 기재부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우리나라의 반도체 세제 지원 수준이 주요국들과 비교해도 낮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법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은 지 11일 만에 기재부는 180도 달라진 개정안을 발표했다. 대기업ㆍ중견기업의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기존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상향한다는 게 골자였다.

기재부의 태도를 바꾼 건 윤 대통령의 말 한마디였다. 정치권과 재계의 반발을 의식한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0일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기재부를 향해 “반도체 등 국가 전략산업의 세제 지원을 추가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참고: 직전 3년간 연평균 투자 금액을 초과하면 10%를 추가 공제해준다. 이를 더하면 대기업ㆍ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의 세액공제율은 각각 25%, 35%까지 높아진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손쉽게 뒤집히는 정책을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여기에 과연 전문성과 진정성이 있을까. 김양팽 연구위원은 “세제혜택을 높인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일관된 기조 없이 말 한마디로 정책이 바뀐다는 점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면서 “이는 국가 신뢰도를 중요한 투자 포인트로 여기는 해외기업들을 유치하는 데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꼬집었다.  

고준영 더스쿠프 경영전문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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