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국 시인은 전남 신안 어의도에서 태어나 2018년 예편하기까지 35년 동안 공군에 근무하며 기상예보관으로 일했다. 2004년 13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회 오월문학상과 2010년 신인상을 받았다. 현재는 한국작가회의 회원과 죽란시사회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 시인: 저는 2004년에 제13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면서부터 이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때 군인 신분이었는데 군인 신분으로 전태일 정신을 시로 쓴다는 것은 좀 뜻밖이기도 하고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
배설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명령에 불복종해 최소한의 수군 병력을 지켜냈고, 한산도 통제영에 있던 막대한 군사물자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막아냈습니다. 전란 직후 처형됐지만 6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돼 사면ㆍ복권됐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했고 군인으로서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한산도대첩 : 세계 해전사史의 별이 되다 앞서 명량해전을 말할 때, 이순신의 전투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철저한 정
이순신은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통일된 지휘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로 내정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기 한달 전인 1593년 7월 15일, 이순신은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습니다. 한산도 통제영의 건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순신은 한산도 곳곳으로 진을 옮기며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전라도로 가는 바닷길을 틀어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593년 3월 8일, “한산도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난중일기」에 등장합
익숙한 단어 몇 개를 떠올려 봅니다. 통영, 충무 그리고 충무김밥. 모두가 임진왜란이나 충무공 이순신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단어를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니, 새삼 신기합니다.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 통제영三道水軍 統制營’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원래 이름은 ‘가배량수’였는데 통제영이 세워진 후부터 통영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였습니다. 삼도三島는 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를 뜻하고, 삼도 수군은 충청 수영ㆍ전라 좌수영ㆍ전라 우수영ㆍ경상 좌수영ㆍ경상 우수영을 의미합니다. 전라
이순신의 탁월함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승리를 해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순신의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목포 고하도에 석달 열흘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사이 본격적으로 수군 재정비를 진행했죠. 지금도 목포 고하도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려 세운 모충각이 있습니다. 고하도뿐만 아니라 목포 곳곳에서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목포 유달산의 끝자락에는 큰 바위로만 이루어진 봉우리가 하나 있습니다. 높이가 60m가량으로, 20층짜리 건물만한 크기입니다. 그 봉우리의 이름은 노적봉
진도대교 아래를 지나는 울돌목의 물결은 오늘도 사납습니다. 울돌목에서 펼쳐진 명량해전 당일 이순신의 기록을 지난호에 이어 소개합니다. 2척의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麾下의 배 2척에 지령하니,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퉈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또는 능장稜杖, 몽둥이를 잡고 혹은 긴 창을 잡고 혹은 수마석水磨石, 반들거리는 돌덩어리를 무수히 난격하였다.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힘이 다하자, 내 배가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왜군이 경상도의 오른쪽 바다라 할 수 있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날이 1597년 7월 16일입니다. 기세등등해진 왜군이 서쪽으로 진격해 오다가 명량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판옥선을 만났습니다. 칠천량해전 두달 후인 9월 16일입니다. 그 결과는 전쟁의 판도를 결정짓는 치명적인 왜군의 패배였습니다.이날 이순신이 지휘한 13척의 배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배였습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던 그때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배설이 지휘하던 배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배설의 배로 기세등등하던 왜군에
명량은 아주 좁은 바닷길입니다. 이순신은 그 좁은 길목을 이용했습니다. 액션영화의 주인공이 벽을 등지고 싸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삼국지에서 장비가 조조의 10만 대군을 장판교에서 막아낸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울돌목은 장판교이고, 이순신의 13척 함대는 장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순신이 선조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을 때에는 함대가 12척이었으나 이후 1척을 추가로 만들어 참전했습니다. 이순신이 죽기를 각오하고 길목을 막지 않았다면, 적군은 탁 트인 바다로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제아무리 천하의 이순신이라고 해도 극적인
군함 5척 대 5척으로 싸운다면 서로 치고 받느라 승리한 쪽에도 피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5척대 50척이 싸울 경우, 그것도 근접전이 아닌 원거리 함포전에서는 화포가 없거나 부실한 쪽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은 이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싸우기 전에 이미 이겨 놓고 싸운 셈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이런 전략을 사용하지 못한 경우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명량해전입니다. 임진왜란 초기와 달리 명량해전 당시에는 일본군도 이순신 해전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군량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가 있어도 군량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토의 70%가량이 산지입니다.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던 시절에 험한 산골과 깊은 강을 건너 자원을 수송하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습니다. 고생은 둘째 치고 너무 비효율적이었죠. 배에 실어서 바다로 운송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이순신 해전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승리를 거듭하던 왜군은 조선군이 아니라 물자의 부족 때문에 발이 묶이기 시작 했습니다.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를 틀어막고 있어
공자의 가르침인 ‘효’는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억압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달랐습니다. 그의 애틋한 효심과 가족애愛는 백성들과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됐습니다. 「난중일기」나 「이충무공전서」에는 하루살이 같은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단호하게 처벌하는 이순신의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랑은 군주와 국가를 향한 충성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 훈련과 전쟁 준비로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
이순신 장군의 발길 따라 전국을 누볐다. 그가 태어난 서울 충무로에서 세상을 떠난 남해 관음포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긴 여정을 시작한 건 500년 시간을 뛰어넘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받은 ‘위안’ 때문이었다.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소통에 능한 리더”라고 잘라 말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를 만났다. ✚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몇해 전 사업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뜻이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왈처(Michael Waltzer)는 “은행이 강도를 당하면 강도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 은행을 비난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보통사람’이라면 은행에 쌓여 있는 돈을 불현듯 갈구한다. 다만 은행의 철통경비와 처벌이 두려워 엄두를 못 낼 뿐이다. 국방도 이와 다르지 않다.영화 ‘명량’ 은 이순신의 영웅 이야기다. 하
영국의 루이스 리처드슨(1881~1953년)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수학자였던 그는 수학적 원리를 기상 예측과 전쟁의 원인분석에 도입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수학자이자 기상학자인 동시에 전쟁학자였다. 리처드슨은 전쟁이라는 참극은 사실상 ‘오산誤算’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전쟁 당사자들이 피아彼我의 국력과 전력을 정확히 계산하고 전쟁의 전개를 기상예측
영화 흥행기록이 경마 경주는 아니지만 김한민 감독의 2014년 작품 ‘명량’은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모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이 기록을 깬다는 것은 어쩐지 상식의 저항마저 불러일으킨다. 세계적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제도는 영원히 나올 수 없다
조벽(60) 교수는 집단지성 시대에 인성이야말로 실력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자기 조율, 타인과의 관계 조율, 자기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공익 조율에 능한 사람이 되라고 조언했다. 인류의 삶에 이바지하겠다는 꿈도 그 연장선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Q 멘티가 멘토에게 인류의 삶에 도움을 주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입니다
명량해전의 승첩 소식을 들은 명나라 장수 양경략은 “조선에도 이런 명장이 있다는 말을 중국에서부터 들었다”면서 심히 기뻐했다. 특히 “13척의 병선으로 330여척의 적선을 이소격중하여 대첩한 일은 고금 천하에 드문 일”이라면서 “붉은 비단 두필과 은 50냥을 이순신에게 보내달라”고 조선 조정에 의뢰했다. 이런 전공에도 이순신은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이
조선 함대와 일본 함대의 전투가 격해질 무렵 조수가 썰물로 돌아서고 있었다. 조선 함대는 물을 따라 싸우고, 일본 함대는 물세를 거슬러 싸워야 했다. 조선 함대는 쏜살같이 적선으로 향했지만 일본 함대는 아무리 힘껏 저어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명량해전의 승기가 조선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안위의 배와 김응함의 배는 새로운 용기를 발휘했다. 조총ㆍ
이순신은 칼을 빼어 들고 배설 이하 제장에게 적선을 맞아 싸울 것을 명하고 스스로 선봉에 섰다. 탄우와 포연을 무릅쓰고 적진을 향하여 포를 쏘며 돌진을 하였던 거다. 순신의 장령을 어기지 못한 배설도 대장선의 뒤를 따라 진격하였다. 명량대첩, 그 서막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드디어 칼을 빼어 들었다. “진군하라.”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이립(而立ㆍ서른)의 나이에 창업을 했다. 도메인 등록 사업이라는 신천지를 열어 15년째 업계 1위 자리를 지켰다. 이청종 후이즈 회장. 새로운 플랫폼 비즈니스를 준비 중인 그는 “플랫폼 비즈니스를 개척하면 블루오션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소프트웨어(SW) 최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이 회장과 만났다. “차별적인 기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