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문장저술은 모두가 슬퍼하는 정과 분개하는 의를 바로 문사에 표현하는 역량과 수완이 있어서 제갈공명의 「출사표」 또는 이영백의 「진정표」와 방출한 논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문장으로 자부하는 일은 그의 일생에 없었다. 임진년 이래로부터 7년간 전쟁에 오직 이순신에게 지우와 은애를 받은 제장들과 혜택을 입은 군민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어서 통영 여수
이완과 진린의 통곡하는 소리에 비로소 순신의 죽음이 알려졌다. 일시에 통곡하여 노량해상에 곡성이 진동하였다. 전에 없는 대승첩을 한 개가는 고사하고 진린 이하 명나라 제장과 조선 제장들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눈물을 씻었다. 순신의 시체가 누운 대장선의 판옥층루로 들어왔다. 순신의 누운 자리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이순신의 전격전술電擊戰術에 놀라
들어누운 순신은 한번 눈을 떠서 장자 회를 보며 “나를 혼자 두고 활을 들고 나가 싸워라. 적을 하나라도 놓아 보내지 말게 하여라”하고 마지막 막을 마쳤다. 다른 유언이라고는 한마디 말이 없어다. 순신은 54세의 혁혁한 일생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먼저 진린은 순신의 전영장 이순신李純信을 빌려서 향도장을 삼아 곤양의 죽도에까지 이르렀더니 소서행
이날 밤에 순신은 진린을 찾아보고 오늘이 가장 조수가 깊으니 총공격을 행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적의 뇌물에 취한 진린은 순신의 말대로 움직이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도리어 진린은 말하되 “나는 아직 행장은 그냥 두고 남해에 있는 적에게 항복한 반민을 먼저 칠까 하오”하고 딴소리를 한다. 명나라 함대를 물려서 행장이 달아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그 이
진린은 순신이 제 공을 자기에게 양보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내조흡 강린약 등을 살려주고 분함과 부끄러움이 풀려서 순신의 손을 잡으면서 “내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장국의 대명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오!”하였다. 그날 저녁에 내유격 왕유격 강천총 정천총을 위시해 명나라 제장들은 패군한 죄를 면한 것을 순신의 은덕이라 하여 그 오만하던 놈들
이순신 혼자서도 넉넉히 적의 수군을 막을 만한 능력이 생겨난 이때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수군과 병선 70여척을 끌고 강화도에서 내려온다고 소식이 왔다. 이름만은 청병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순신의 행동을 견제 또는 간섭해 적을 놓아 보내고 마침내는 순신을 관음포에서 죽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정은 부하제장의 주장을 물리쳐 말하기를 “울산성에
막내 이면은 나이 스물하나요, 아직 총각이었다. 혈기가 넘치고 말타기, 활쏘기와 검술에 정통하였으며 무용이 절륜하여 그 부친의 풍도가 있었다. 순신도 항상 자기를 닮은 것을 더 사랑하였다. 이면은 신주와 모친 방씨와 집안사람들을 피난가게 하고, 자신은 7척 장검을 들고 적병이 온다는 곳으로 마주 나갔다. 남원 선비 조경남趙慶男은 충의지사였다. 의병을 일으켜
배설은 자기의 병선도 군사도 돌아보지 않고 단기로 도주하였다. 배설의 도주는 삼군의 장졸에게 큰 불안을 주었다. 새로 온 전라우수사 김억추까지도 무예는 있다 하나 아직 연소하고 전장의 경험과 학식이 전임 이억기에게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 위태롭구나, 백암 이장군이여! 삼도통제사라는 이름뿐이요, 병선이 있나 군량이 있나 군사가 있나 군기가 갖추어졌나. 나라일
윤근수는 이순신의 영웅적 기백과 전략적 논리에 심취가 되었다. 그 도도유창한 물 흐르듯 하는 웅변에 윤근수의 정신은 출렁이고 의지는 멀리 돌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인형과 같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악형할 것을 잊어버렸다. 이날은 그만 하고 말았다. 그 진술기록을 본 대소관리들은 다들 탄복하여 모두 순신 같은 당대 영웅을 한번 대면하기를 원하였다. 제1차 국문
순신은 백성들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상감께오서 잡아들이라는 명이 계시니 아니 갈 수 없소. 여러분들의 정성은 고마우나 이렇게 길을 막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도리어 옳지 못한 일이오.” 순신이 배에 올라 나갈 때에 바다에 지키고 있던 병선과 민선에서는 일제히 통곡소리가 일어났다. 순신은 우후 이몽구, 거제현령 안위, 고성현령 조응도 등 제장을 불러 울
권율은 순신의 충고하는 말의 진의와 요령을 깨닫지 못하였다. 순신은 자기의 과거의 죄명을 변경하자는 것도 아니요, 또 원균을 두호하자는 것도 아니요, 오직 국방대책의 이해득실만 말한 것으로 광명정대한 사리를 풀어 말한 것이건마는 권율은 처음에는 그 과거의 죄를 변명한다고 듣고 노하였다가 나중에는 원균을 두호하는 줄로 듣고 그래도 순신은 관대하다고 하여 탄복
원균은 순신의 원대한 규모를 반대하여 군관 이외에는 칼을 차기를 금하여 순신이 만든 긴 칼은 쓸데가 없어 되어 한산도 군기고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원균이 이때에야 술이 번쩍 깨고 정신이 돌아와 뱃머리에 나서서 바라보았다. 포구 안에는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요 탄환과 화살 나는 소리였다. 조선 병선 몇 척에는 벌써 불이 일어나 화광이 하늘을 찌르고 그 화
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을 위로했다. 피난을 가면 거기도 적병이 올지 모르고 또 깊은 산골짜기에는 도적과 맹수의 환란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다들 집에 돌아가 생업에 전념하라고 타일렀다. 순인은 “여러분 중에 젊으신 이는 나라일이 위급하니 나를 따라 종군 출전하기를 바라오”하고 권고하였다. 그러하여 그 자리에서 장정 30여인이 순신의 부하되기를 자원하였다.
[CBS The Scoop] 서인 대관 몇 사람과 북당들 중에도 소위 유식계급이란 작자들은 말하기를 이순신을 잡아오기는 난문제가 아니라 하였다. 그는 순신의 충성만은 속마음으로 잘 아는 바였다. 왕명이라 하면 그는 두말없이 잡혀 올 것을 믿는 까닭이었다. 금부도사 10여인이 건장한 나졸을 많이 데리고 한산도에 들어온 것은 1월 25일이었다. 황신이 위유사로
[CBS The Scoop] 적군의 부전수가 비밀회의를 하기 이순신은 싸워서 이기기 어려운 장수이니 조선정부의 당파싸움을 이용해 반간계를 쓰는 것이 옳다고 결정했다. 그 운동비 즉 기밀비를 대장대보 자속정가에게 청구해 행장과 청정이 먼저 부산에 건너갔다. 그런데도 일본제장들은 이순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를 걱정했다. 원균은 품성이 바르지 못하면서도 교활하여
풍신수길의 일본국왕 책봉식이 거행됐다. 이번 책봉으로 명나라와 일본은 화의를 맺었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화의는 성사되지 않았다. 수길은 조선의 사신 황신을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보기를 거절했다. 병신1596년 9월 2일에 대판에서 풍신수길의 일본국왕 책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수길은 복견성 안에 굉장한 궁궐을 지어 화려하게 장식을 하여 명나라 책봉사를
[CBS The Scoop] 명나라 조정은 이종성이 달아났다는 보고를 듣고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승직시켰다. 심유경이 조선조정에 대해 일본에 통호사를 보낼 것을 청했다. 조선에서는 화의를 원치 않아 거절했다. 그러나 대국의 사신이 조르는 통에 마침내 부득이하게 사신을 보내게 됐다. 좌의정 윤두수가 도체찰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 통제사 이순신
[CBS The Scoop] 순신은 한산도 수루 위에서 매양 달 밝고 한적한 밤이면 시사를 살폈다. 여러 방면으로 걱정이 많았다. 창연히 바다를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하루 밤은 시조를 지어 읊어 마음속을 드러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이 유진한 뒤가 안전지대라는 소문을 들은 삼남 유민은 난을 피하여 남부여대1)하며 부로휴유2)하고 순신의
[CBS The Scoop] 명나라 관리 양보는 순신을 대하였다. 가만히 순신의 주사를 보니 그 세력이 무적함대라 부를 만하였다. 양보가 순신을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순신의 인격을 존경하여 마주앉기를 굳이 사양하고 손을 모으고 시립하여 서있었다. 잠시 이야기하고도 영웅을 만나보았다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순신은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조정에 청하여
명나라 관리 양보는 순신을 대하였다. 가만히 순신의 주사를 보니 그 세력이 무적함대라 부를 만하였다. 양보가 순신을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순신의 인격을 존경하여 마주앉기를 굳이 사양하고 손을 모으고 시립하여 서있었다. 잠시 이야기하고도 영웅을 만나보았다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순신은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조정에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좌수영은 금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