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근길을 오가며 마주하는 커다란 옥외 광고탑입니다. 어느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가 꽤 오랜 시간 걸려 있던 자리입니다. 어느날 멀리서 보니 광고판 반쪽이 하얗게 변해 있더군요.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이내 알아차렸습니다. 광고판 교체 작업중이더군요. # 때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뀝니다. 빠르게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화면을 확대합니다. 외줄에 매달린 작업자가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페인트통에 롤러 붓을 푹 담근 다음 팔을 크게 휘젓습니다. 외줄 하나에 의지했지만 힘찬 손짓입니다. 그 손짓에
몇개의 카테고리(category)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속에 우격다짐으로 집어넣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대단히 난폭해질 수 있어 썩 바람직하지 않다. ‘여자와 남자’라든지 ‘흑인ㆍ백인ㆍ황인’이라는 분류도 그렇고, ‘상류층ㆍ중산층ㆍ서민층’이라는 분류도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현상이나 인간은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집어넣어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다.사람들은 예술작품이나 영화를 대개 ‘장르(genre)’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어떤 영화든 복합적인 요소들로 채워져 있어 특정한 장르로 규정
“수도관 파손 때문에 공업용수가 유입됐다.” 지난 10월 안양시 일대에서 발생한 탁수 현상을 두고 한국수자원공사는 안양시에 이렇게 설명했다. 거짓말이었다. 1년 전 한국수자원공사 측이 공업용수 수도관을 생활용수 수도관에 잘못 연결했던 게 탁수의 원인이었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자 수공 측은 “주민 피해 보상이 완료된 이후에 보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더스쿠프가 한국수자원공사의 황당한 거짓말 논란을 단독 취재했다.지난 10월 24일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과 호계3동에선 큰 소란이 벌어졌다. 맑은 수돗물이 흘러야 할 수도꼭지에서 혼탁한
갤러리엔 ‘큐레이터(curator)’가 있다. 큐레이터의 역할은 좋은 작품을 관람객이나 컬렉터의 취향에 맞춰 소개 또는 추천하는 것이다.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머릿속에 상당한 데이터가 축적돼 있지 않다면 작품을 소개하거나 추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큐레이터 중 몇몇은 전시회를 기획하고 사업화하는 업무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들을 디렉터(director)라고 부른다.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다양할 순 있지만, 디렉터급 큐레이터는 경력이 많고, 전문성을 갖는다. 예술품 쇼핑 중독자 찰스 사치의 최초 문답집
김이듬 시인이 운영하는 독립서점 ‘책방이듬’이 지난 3월 31일을 끝으로 영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책방이듬은 지난 2017년 11월 경기도 일산에서 문을 열었다. 반려견의 간식을 만드는 곳이었던 장소를 김이듬 시인이 손수 페인트칠을 하며 책방으로 꾸몄다. 단순히 책을 파는 가게에만 그치지 않고 카페를 겸하며 시 낭독회, 독서 모임 등 다양한 행사들을 열었다. 6년 동안 300회가 넘는 행사들을 진행해오면서, 책방이듬은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한편으로는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글을 실어 발표하
# 산을 깎은 다음 뚝딱뚝딱. 아파트가 올라갑니다. 크레인이 사라진 걸 보니 어느새 다 올라갔나 봅니다. 산비탈 층층이 있던 낮은 집들은 사라지고 이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맞은편 바위산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지만 누군가에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이니 또 얼마나 설렐까 싶습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입장마다 다르게 보입니다.# 등굣길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저 멀리 꼭대기 회색벽에서 무언가 왔다갔다 합니다. 이내 건물벽이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그렇습니다. 한 작업자가 외벽에서 페인트
운전자들 중엔 차를 직접 청소하는 ‘손세차’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관련 시장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세차스타트업 팀와이퍼의 조사에 따르면, 손세차 시장 규모는 2조원(2019년 기준·추정치)으로, 기계식세차(1조원)·출장세차(4300억원)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손세차의 장점은 기계식세차보다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들지만 기계가 닿지 않는 곳을 꼼꼼하게 세척할 수 있다는 거다. 문제는 정확한 지식 없이 손세차를 하는 경우 되레 차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무엇보다 손세차를 제대로 하려면 적합한 세제를 고를 줄
포장재 없이 제품만 판매하는 ‘제로웨이스트(zero waste)’ 매장이 하나둘 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제로웨이스트 매장은 정부나 기업이 나서서 만든 게 아니다. 기업들이 환경 문제에 책임을 갖고 만든 매장도 있긴 하지만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제로웨이스트 매장은 ‘넘쳐나는 폐기물’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제로웨이스트 매장 중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지난 6월 경기도 부천시에 문을 연 ‘산제로 상점’은 엄마들이 만든 제로웨이스트 매장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 아이들이 신났습니다. 오늘은 동네 근처에 새로 생긴 놀이터에 가는 날입니다. 간단하게 주먹밥을 만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보리차와 식혜도 챙깁니다. 도착해보니 놀이터의 규모가 생각보다 큽니다.그동안 쓰레기 무단투기로 훼손된 공원 용지를 구청과 전문가들이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만든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모래놀이터와 집라인, 엄청 긴 미끄럼틀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거리가 많더군요. #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흙먼지가 나는 모래바닥에 페인트 칠이 벗겨진 축구 골
역대 정부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다양한 고졸취업자 지원정책을 내놨다. 하지만 그 지원정책이 알찬 성과를 냈는지는 의문이다. 고졸자 실업률은 여전히 대졸자보다 높고, 근무여건은 열악해서다. 문제는 기업을 활용해 고졸취업자를 간접지원하는 정책이 더 큰 부작용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이 인재 양성보다 지원금을 받는 데 치중해서다. 염불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선 대학을 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1990년대 초만 해도 30%대에 불과하던 대학진학률이 현재
열경화성熱硬化性 플라스틱의 일종인 에폭시수지는 모든 산업에서 두루 쓰인다. 배를 만드는 데도, 건설현장에서도, 반도체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다. 최근 국내 조선업계가 연이은 수주행진을 기록하자 에폭시수지의 수요가 덩달아 늘어난 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에폭시수지를 생산하고 있는 국도화학을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코로나19로 위축됐던 수요가 터지면서 산업 분위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해운업계는 긴 불황의 터널을 뚫고 부활의 뱃고동을 울렸고, 조선업계도 수주잭팟을 잇따라 터뜨리고 있다. 철강업계는
그 옛날 그 대문을 창신동에서 다시 본다. 두꺼운 지붕에 명패, 우편함, 초인종 등 군더더기가 참 많다. 하지만 그 옛날 그 시절엔 뭐 하나 하찮은 게 없었을 게다. 명패는 내 집의 상징물이었을 테고, 우편함은 새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을 것이다. 하물며 초인종이 없으면 철문을 쾅쾅 두드리거나 소리를 질러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하찮아진 그것들을 보면서 나는 낭만을 소환해 본다.■대문의 형태 = 주택의 대문엔 으레 지붕이 있다. 지붕이 없어도 대문 역할을 능히 할 수 있는데 굳이 무겁고 두꺼운 콘크리트 지붕을 머리 위에
우리나라 내연차에 달린 번호판 대부분은 ‘페인트 방식’이다. 그래서 페인트가 벗겨지면 인식률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대안으로 내놓은 새 번호판은 ‘재귀반사식’이다. 쉽게 말해, 반사율을 높인 방식인데 인식률이 좋다는 장점이 있다. 국내 전기차 등 친환경차 번호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업계에선 재귀반사식 번호판의 인식률이 신통치 않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왜 이런 논란이 일어난 걸까.자동차라면 다 달려 있는 ‘번호판’. 별것 아닌 듯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차주車主의 신분을 확실하게 알려도 떳떳하고 문제
영국의 시골 도시, 작은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렸다. 물감 자국이 두껍게 굳은 신문지 뭉치, 수북하게 쌓인 페인트통….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이름이 알려진 건 70세가 넘어서였다. ‘할머니 화가’ 로즈 와일리(Rose Wylie)가 영국 일간지 가디언지의 ‘영국에서 가장 핫한 작가’로 선정됐을 때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최고령 신진작가로 영국을 단숨에 사로잡은 그는 이후 세계 3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의 전속작가로 등극했다.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로즈 와일리는 여전히 소녀 같
뇌가 아픈 엄마를 위해 커다란 창문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꿈을 접고 무작정 목수木手의 길을 걸었다. 험난했지만 고달프지만은 않았다. 그 길 한복판에서 ‘아픈 기억’ 속 아버지와 조우했다. 우연히 만난 하찮은 쓰레기통에선 작은 희망도 찾아냈다. ‘자연놀이터 제작소’의 박재상(45) 소장은 목수다. 가구를 만들고, 집을 지으며, 숲놀이터를 제작한다. 때론 설계도 직접 한다. 평범한 목수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가구·집·숲놀이터를 모두 만들 줄 알고, 시공에 설계까지 하는 목수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그런데도 그는 “원칙대로 땀 흘
직관적이면서도 강렬한 필체를 화폭에 담아 온 권순철 작가가 4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흔적(Trace)’이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선 지난 50년 한국인의 삶과 역사에 관여했던 사건과 인물을 형상화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오랜 시간 한국의 산과 강, 한국인의 얼굴을 반복적인 덧칠로 표현해왔다. 겹겹이 쌓인 오일페인트로 탄생한 얼굴은 누군가의 얼굴이 됐다가 모두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흔적 같기도 하다. 작가는 사라져가는 형상들의 흔적을 남기며 그들의 존재를 생각하고, 또 기억한다. 제1전시장에선 한국전쟁과 분단
발음해봐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그는 미사일이 날아오는 모스크바에서전화기와 이 세계의 마지막 운명을 들고 있었지기계와 회로의 정확성보다 자신의 예감을 믿었던 사람5에는 50으로 대응하는 마음이 아니라대양을 건너오는 다섯 발의 죽음을 기다려보기로 결정한 사람죽음을 나누지 않으리라는사람의 마음을 믿었던 사람어쩌면 1983년 9월 26일에 끝나야 하는 날들그의 손자와 손자의 자손은 유예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그는 2017년 5월 19일, 자신이 지킨 세계를 두고 떠났다중령이 잠시 미뤄둔 종말, 정말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지난여름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문을 연 조형예술 갤러리 매스(MASS)는 입체·오브제 아티스트들을 위한 공간이다. 작가는 자신의 언어를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업으로 펼쳐낼 수 있고, 관람객은 입체·오브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의 장인정신이 깃든 한정판 에디션까지 현장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다. 갤러리 매스가 첫 초대기획전으로 소개하는 주인공은 한국과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설치미술가이자 무대미술가인 배수영 작가다. 그는 컴퓨터 회로 부품을 소재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
몇주 동안 우리는 시간 나는 대로 더 많은 창살을 찾아 골목을 탐색했다. 창살을 찾는다는 목표를 정하고 골목을 둘러보니,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창살부터 독특한 문양이 있는 창살까지 다양한 종류가 눈에 들어온다. 건축가와 사진작가의 길걷수다 창신동 방범창살 두번째 이야기다. 요즘 방범창살 대부분은 감옥의 철창살처럼 단순한 모양이다. 옛 창살들이 다양한 형태와 장식으로 만들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왜일까. 현장답사로 수집한 자료의 분석을 통해 ‘방범창살’을 이론적으로 고찰해보자.■ 재료 고찰=옛 방범창살의 재료는 폭 1~2
영화 ‘가을의 전설’의 서사의 시작과 끝은 ‘One Stab(한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의 내레이션으로 이뤄진다. 아마도 미군에게 토벌당하기 전에는 인디언 부락에서 ‘한칼’ 했던 인물인 듯하다. 러드로 대령이 세상을 등지고 몬태나 산자락의 황야에 정착하면서 함께 목장을 일군 ‘창업공신’쯤 돼 보인다. 몬태나의 산자락 목장에 은거한 러드로 대령은 자신이 토벌하던 인디언들과 함께 살아간다. ‘한칼’ 외에도, 러드로 대령의 목장 동료들은 인디언 여자들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러드로 대령은 인디언의 문화와 전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