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視리즈] 미중 반도체 전쟁과 새우등➋
반도체 산업 뒤덮은 미중 갈등
대규모 자본 앞세운 美 칩스법
국내 기업 생산 비중 큰 中 공장
어느 한쪽 설 수 없는 K-반도체
기울어진 무게추 역효과 낼 수도

# ‘우리는 칩 전쟁 중(We’re in a chip war).’ 미국의 경제지 포천이 지난 1월 보도한 기사의 타이틀입니다. 맞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지금 세계 경제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 한복판에 위에 있습니다.

# 미중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서로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격화하면서, 그 사이에 놓인 우리나라도 반도체 전략을 두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G2의 칩 전쟁 속에서 한국의 돌파구는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미국의 칩스법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도 불확실한 경영 여건에 놓이게 됐다.[사진=연합뉴스]
미국의 칩스법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도 불확실한 경영 여건에 놓이게 됐다.[사진=연합뉴스]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첨단 기술 분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미국은 ‘칩스법’으로, 중국은 ‘미국 기업 찍어내기’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난감한 건 우리나라입니다. 우리에겐 미국의 기술과 자본만큼이나 중국의 거대한 시장이 필요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한국에 필요한 건 ‘등거리 외교’입니다.

하지만 어째선지 ‘반도체 외교’의 무게추가 미국으로 기우는 듯합니다. 이 때문에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칩스법에만 따르자니 중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포기해야 하고, 미국이 정한 ‘룰’에서 벗어나자니 글로벌 시장에서 장기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두 기업 모두 첨단 반도체에 해당하는 제품을 중국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와 D램 물량의 40%, 20%를 중국에서 생산합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중국 시장의 매출 비중이 전체의 30%가량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 시장에만 올인하기엔 리스크가 적지 않습니다.

엄재철 반도체 산업구조 선진화 연구회 정책부회장은 “만약 중국 공장의 투자가 축소되고 증설이 어려워지면 기업엔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반도체는 장치 산업이다. 성능이 좋은 새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제조장비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반도체는 작게 만드는 게 핵심인데, 제품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구형 장비로는 생산에 한계가 있다. (첨단 반도체의 경우) 현재 칩스법에선 5% 미만까지 중국 공장을 확장할 수 있도록 허용해줬지만, 신규 장비를 지속적으로 반입해야 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론 턱도 없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반도체 시장에는 일종의 사이클이 존재합니다. 통상 신제품 출시와 함께 기존 제품의 가격이 30~40% 떨어지는 시기가 오는데, 이때 공장에 새로운 장비를 들이지 못하면 반도체 기업은 ‘철 지난 제품’을 싼값에 팔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는 자칫 기업의 수익성 저하→실적 악화→투자 부진→기술력 약화→경쟁력 감소란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역으로 풀면, 반도체 기업에 설비는 상품을 제값에 팔 수 있느냐 아니냐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칩스법으로 중국에서의 설비 투자에 제동을 걸어버렸으니, 반도체 기업들로선 손발이 꽁꽁 묶인 셈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듯, 미국은 반도체 장비 제조사들이 중국에 제품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상태입니다. 중국에 신규 반도체 장비가 반입되는 경로 중 하나를 봉쇄한 것이나 다름없는 거죠.

우리나라 기업들은 ‘제3국 기업’이란 이유로 이 규칙의 적용을 1년 유예받았습니다만, 그 기간이 올 10월까지라 추가 연장이 시급한 시점입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 ‘정부 책임론’이 불거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지금 반도체 시장엔 칩스법에 장비 판매 금지까지, 중국을 향한 미국의 ‘이중규제’가 단단히 걸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외교적 해법’은 우리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개별 기업의 협상으론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정부 차원의 실무 협상으로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남건욱 극동대(글로벌반도체공학) 교수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가시적 성과를 기대한 분위기였다”면서 말을 꺼냈습니다. 그는 “정상회담 이전 실무적으로 세밀한 논의를 진행하고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졌다면 성명서 형태를 통해 구체적인 결과가 발표됐을 것”이라면서 “(칩스법 완화를 두고) 사전에 실무적 조율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칩스법에 따라 세액 공제를 받는다고 해도 거기엔 여러 가지 조건이 붙는다”면서 “그런 제약 조건들이 사실상 기업의 독립적인 경영을 침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어서 어느 정도 (조건이) 완화되기를 기대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칩스법과 장비 판매 금지 조치를 통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이중으로 제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미국은 칩스법과 장비 판매 금지 조치를 통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이중으로 제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가령, 칩스법의 수혜를 받는 기업은 생산량, 수익 전망치 등을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합니다.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초과수익’이 날 경우엔 일부를 미 정부에 전달해야 한다는 원칙도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정보 유출이나 경영 간섭을 우려할 만한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선 이런 세부적인 규정을 둘러싼 논의는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한국-중국 간 관계를 재설정해 우리 기업의 실익을 위한 명분을 확보한 것도 아닙니다. 이종환 상명대(시스템반도체공학) 교수는 “국내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이른다”면서 “미국 일변도 정책으로 가선 안 된다”고 꼬집었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중국과 사업을 잘해왔던 부분들을 한번에 무너뜨려선 안 된다”면서 “미중 양축을 모두 고려한 전략을 설계해야 우리에게 실질적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엄재철 부회장 역시 “반도체 기업뿐만 아니라 장비 제조 업체들에도 중국은 중요한 시장”이라면서 미중 사이 줄타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 대중제재와 후폭풍 

장비 분야에선 신생에 가까운 우리 기업의 경우 저가용 장비를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는 것이 주된 판로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칩스법과 중국 내 판매금지 원칙으로 이 판로가 막히면서 장비 제조 업체들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의 노선만 고집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반도체 기업은 미국 시장은 확장하고, 중국 시장은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의 칩스법 대응 전략도 두 시장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지금 ‘미국’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우선 반도체 분야 협력을 두고 중국과 논의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최근 국민의힘 원내지도부와의 만찬 자리에서 지난 정부의 외교 노선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친중親中 정책을 폈는데, 중국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우리 반도체 산업이 미중의 역학관계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슬아슬한’ 발언입니다. 더욱이 직전 정부의 등거리 외교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선 G2 사이에서 새우등만 휘는 꼴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 부회장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후속으로 (칩스법 관련) 협의를 이어간다곤 하지만 그것이 실무 차원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면서 “그러다보니 기업 입장에선 큰 그림이나 가이드라인을 그리기가 난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부도, 기업도 걸음을 멈춰선 상황에서 우리 반도체는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할까요? 미국에 무게를 잔뜩 실은 정부의 선택이 우리 반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heartbri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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