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의 대표는 누가 될까. 당심을 넘어 민심이 반영될까. 답은 ‘글쎄’로 수렴한다. 집권당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이들이 당심이나 민심이 아닌 권력자의 마음을 좇고 있다는 의문이 곳곳에서 제기돼서다. 더 큰 문제는 측근이란 사람들이 권력자가 진짜 민심을 읽을 수 있도록 돕고 있느냐다. 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7편을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과 현 정치권의 상황을 살펴봤다. 북병사 김우서는 일개 진영鎭營의 변방 장수인 이순신이 여진족 울지내를 생포한 공을 세운 것을 시기했다. 조정에 이런 내용의 장계狀啓를 올렸다. “이순신
한쪽에선 대통령이 검찰이란 ‘충견’을 동원해 자신들의 대표에게 누명을 씌운다고 말한다. 대통령 쪽에선 ‘법과 원칙’이란 구호만 거듭 내세울 뿐이다.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역사는 정의로운 쪽을 선택할 것이다. 온갖 누명을 받았음에도 결백함을 끝내 밝혀낸 이순신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한양의 훈련원에서 8개월 동안 상관인 서익의 인사청탁을 거부하며 힘겹게 지내던 이순신은 1579년 10월 충청병사(병마절도사의 약칭·무관 외관직 종2품)의 군관으로 발령났다. 충남 해미로 부임한 순신이 기거하는 숙소 안.거기에는
거대 야당 대표를 둘러싼 의혹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어느 장관의 해임 문제도 점입가경이다. 여야는 예산안까지 처리를 미루면서 대치하고 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해’라는 말을 던지는 여야 정치권에 정말 ‘민생’이란 단어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에게 ‘청백리 사상’ 따위를 기대하는 것도 이젠 무리일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이순신 같은 지도자는 없는 걸까. 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네번째 편이다. 약관의 나이에 경전의 깊은 뜻을 이해하며 통찰력을 키워 온 이순신은 진작에 무관 공직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세 무렵 금강
컬링 여자대표팀 ‘팀 킴’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가족으로 구성된 팀 킴의 지도부가 선수들에게 갑질을 일삼고 컬링 업계를 좌지우지했다는 거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이 사건에서 기시감旣視感을 느낄 수 있다. 가족 경영으로 지배력을 강화하고 성장의 과실을 빼먹는 건 한국 재계에선 일상화된 일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팀 킴 논란과 쏙 빼닮은 한국경제의 민낯을 들여다봤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최고 스타는 ‘팀 킴(경북체육회 여자 컬링팀)’이었다. 김은정, 김영미, 김경애, 김선영, 김초희 등으로 구성된 팀 킴은 세계 최고
이순신은 1579년 2월 종8품 훈련원 봉사가 됐습니다. 훈련원 봉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순신의 상관 중에 서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익은 이조정랑이었습니다. 이조정랑은 정5품에 불과하지만 인사권에 관여하기 때문에 매우 영향력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서익은 그의 측근을 특진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종8품 봉사에 불과한 이순신이 반대하고 나서는 게 아닙니까? 이 일로 이순신은 서익의 눈밖에 났고, 얼마 못 가서 지방으로 좌천당하고 말았습니다.이순신의 성품이 얼마나 대쪽 같았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는 또 있습니다. 말씀드렸듯
스물세살의 청년 이순신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회薈라고 지었습니다. 이순신은 스물한살에 결혼했습니다. 부인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입니다. 방진은 조선 제일의 명궁名弓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합니다.이순신은 결혼 1년 후인 스물두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무과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과를 준비하기 시작한 시기를 보면 부인과 장인(명궁이자 무신)의 영향이 컸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신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준비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명분과 실리는 다르다. “진정한 가치는 영원하다”는 말도 있지만 멋진 명분이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냉정한 시장에서 명분만큼 중요한 건 ‘매력’이다. 2015년 창업한 ‘우시산(울산의 옛 이름)’은 요즘 주목 받는 사회적기업 중 한곳이다. 실버 바리스타를 고용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희망을 펼칠 공간(갤러리)을 선뜻 제공하며, 날로 사라지는 ‘고래자산’을 보호하는 문화 콘텐트를 만들고 있으니, 이목을 끌 만하다.우시산의 매력은 ‘사람’이다. 실버인력·경단녀·청년인력·자원봉사자들이 연출하는 하모니는 아름답고 경
두번째 국문 자리에서 윤근수는 이순신의 기백과 논리에 심취했다. 도도유창한 웅변에 윤근수는 정신이 나간 듯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 악형惡刑할 것을 잊어버렸다. 조정에 득실대던 서인과 북당들은 이렇게 이순신의 자백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윤근수는 세번째 국문에선 이순신을 고문하기로 결심하였다. 윤근수는 이순신을 강하게 몰아세웠다. “적장 가등청
울지내는 뒤늦게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에 빠진 줄 깨달았다. 전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제 부하 군사의 군복을 바꿔 입고 기어서라도 고개를 넘어 도망하려 하는데 문득 한사람 7척 장검을 비껴들고 준마를 빨리 몰아 앞을 막아 내닫는다. 이순신이었다. 조정이 이순신을 북방으로 보냈지만 사실 그곳에 가고 싶어하는 무장은 별로 없었다. 적들이 들어오는 길목에 있고 소진이어서 군사도 수백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원해주는 사람이 없는 이순신에게 이 벼슬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순신은 도리어 장부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자리라
북방 오랑캐는 조선과 중국의 우환거리였다. 이들이 침범하면 마을을 분탕질하고 부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북방에 편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당시 함경북병사 김우서金禹瑞, 온성穩城부사 신립申砬, 경원慶源부사 김수金燧, 부령富寧부사 김의현金義賢 등은 다 조정에서 선발한 명장이라고 하는 인물들이었지만 이들을 섬멸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어느날, 전라좌수사 성박成鑮은 발포진 객사에 늙은 오동나무 한그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거문고 재료로 사용하고자 군관을 보내 베어 오라고 명했다. 성박은 음률에 취미가
1579년 2월, 순신은 훈련원 봉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때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하관직이던 순신이 이를 불허했다. 서익은 상관의 지위를 악용해 순신을 억압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다들 순신이 앞날을 돌보지 않는다고 걱정했다.세월이 흘러 서애 유성룡과 율곡 이이 두 사람이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율곡이 서애에게 물었다. “우리나라가 남왜南倭와 북호北胡 사이에 있어 때때로 변경이 시끄러우니 만일에 대란이 일어난다면 누구를 대장으로 삼아 난을 평정하겠소?
순신의 나이 20여세에 이르러서는 필법이 정묘하여 명필의 수완이 있었다. 그러나 무예를 열심히 연습하기 때문에 붓대를 집어던지고 준마를 달리고 강궁을 당기며 조선 팔도를 두루 역람했다.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바다의 깊고 얕음, 섬들의 크고 작음을 정찰하며 백성의 풍속을 통찰하기 위해서였다. 이준경은 방진이 사위를 구하는 사정을 듣고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풍채가 비범하여 장래에 이름이 천하에 떨칠 제후의 상이라며 정성과 효도가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방진에게 권하였다. 방진은 본래부터 이준경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음을 심복하던 터였다
윤근수는 이순신의 영웅적 기백과 전략적 논리에 심취가 되었다. 그 도도유창한 물 흐르듯 하는 웅변에 윤근수의 정신은 출렁이고 의지는 멀리 돌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인형과 같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악형할 것을 잊어버렸다. 이날은 그만 하고 말았다. 그 진술기록을 본 대소관리들은 다들 탄복하여 모두 순신 같은 당대 영웅을 한번 대면하기를 원하였다. 제1차 국문
어떻게 살 것인가? 20세 청년 이순신은 ‘해諧’를 안고 간다. 문文과 무武를 따로 보지 않았다. 같이諧 했다. 인문학적 소양과 건강한 신체를 일신에 화합하고자 노력했다.그는 21세에 가장이 된다. 상주 방씨와 결혼했다. 장인은 ‘방진方震’이다. 방진은 방진方陣에 능했다. 병법에 뛰어났다는 얘기다. 특히 궁술이 훌륭했다. 아들이 없던 장인은 사위에게 자신의
이순신공이 전시에 세운 공훈이 만고에 이름을 드리워 일월과 빛을 다투었으니 공은 우뚝 서서 홀로 가는 우주간의 바른 기운일지로다.이해 신사1581년 4월에 도로 임명되어 다시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1) 이는 그 무죄함을 조정에서 알고 군기경차관이 반좌율2) 에 저촉되어 파직된 것이다. 순신의 전통箭筒은 옛날 명인의 작품으로 용과 봉을 조각한 것인데 상당한
순신이 병자1576년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1)의 권관2)이 되어 부임하였다. 이때 함경감사 이후백李後白이 변방의 진鎭을 순방하여 장수들의 무예를 시험보아 불능한 자는 형벌로 다스렸다. 장수들이 평소에 무예에 태만하다가 그 엄형을 면하는 자가 드물었다. 감사가 차차 순방하여 순신의 진에 이르렀다. 원래 청련靑蓮 이후백은 지인지감이 있는 재상이라 순신을 한
순신의 나이 십구세가 되어 학문을 많이 이루었으나 더 연구하기 위하여 그 부모에게 허락을 얻어 가지고 홍연해洪漣海 선거이宣居怡 등 동지들과 더불어 강원도 금강산으로 글공부를 갔던 것이다. 몇 달을 머무는 중에 하루는 마음을 풀어 후련하게 하려고 정신과 용기를 북돋워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천봉만학千峯萬壑의 기이한 경치를 완상하더니 문득 발 아래 바위구멍에서